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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걷기, 행복

들바람 2006. 12. 25. 09:56

'나는 달린다'는 책을 쓴 요쉬카 피셔 독일 외무부 장관. 이 양반은 꽤 별난 사람같다.

고등학교 중퇴에다 노숙자, 택시운전사, 녹색당 당수 등을 거친 인생유전도 별나지만 하는 행동거지는 더 유별나다.
독일에서 대중스타가 된 그가 얼마전 다섯번째 결혼을 했다. 행복한 만남과 가슴 아픈 이별을 반복하는 걸 보면 기가 뻗치는 다혈질임에 틀림없다. 

한번 작심하면 끝을 보고 마는 그 스타일대로 다이어트도 화끈하다. 먹을 때는 너무 먹어 몸무게를 주체하지 못하고, 살을 뺄 때는 앞뒤 안가리고 달려 결국 날씬한 몸을 만들어 낸다.
지금은 신혼 초니까 아마 살을 빼고 관리하는 쪽이겠지만 언젠가 또 무슨 계기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시 몸을 불리고 이별을 맞이할지 모른다. 

그는 적게 먹고 많이 달리는 방법으로 1년만에 몸무게를 112kg에서 75kg으로 줄였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그가 달리면서 깨달은 것들이다. 그는 자신의 비만이 결국 세상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고, 체중을 줄이는 것이 욕망을 버리는 일과 같다는 점을 깨닫는다.

달리기가 그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과 마음까지 건강한 상태로 돌려 놓은 것이다. 그래서 나도 달려 보려고 하지만 아무래도 내 체질이 아니다. 중학교 때부터 꼴찌를 도맡아 온 오래달리기 실력이 어디 갈리 없다.

하지만 나도 걷는 것 만큼은 자신있다. 달리기 광이 있듯 굴리기(자전거) 광도 있고, 걷기 광도 있다. 물론 오르기(등산) 광도 있다.

'나는 걷는다'는 3권짜리 책을 쓴 베르나르 올리비에. 30여년간 프랑스의 주요 일간지와 방송국에서 정치,경제부 기자로 일했던 그는 63세 은퇴한 나이에 실크로드 대장정에 나선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1099일간 1만2000여km를 걷는다.

그 여정의 기록은 세상과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고독한 `행복일기' 다. 은근과 끈기로 뭉친 이 양반은 확실히 요쉬카 피셔와는 색깔이 다르다.
 
걷기라면 우리나라에도 고수가 많다. 멀리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와 18세기 중반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평생을 강호유랑(江湖流浪)과 주유천하(周遊天下)로 보냈다.

몇년전 '다시 쓰는 택리지'란 책을 쓴 신성일 씨는 남한의 7대 강과 300여곳의 산을 모두 걸었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그는 10여권의 답사기를 쓴 유명 저자다.
 
노처녀 김남희 씨도 걷기파의 계보를 잇는 신예다. 그녀는 해남 땅끝마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걷고 걸었다. 그것도 모자라 틈만나면 2∼3일짜리 도보여행을 떠나다가 끝내 사표를 내고 온전히 길 위에 섰다. 얼마 전에는 티벳의 어느 지방인가를 걷고 있다는 글을 올렸는데, 지금은 어디를 걷고 있는 지 궁금하다.
 
올 여름휴가 때는 그녀가 추천한 길 가운데 한곳을 골라 걸어보았다. 강원도 인제, 방태산 자락의 외딴 산골인 '아침가리'. 산이 너무 깊어 '아침에 해가 잠깐 날 때만 밭을 간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옛 화전민 마을이다. 그곳 깊은 산길을 하루 종일 걸으면서 나는 영화 속의 '동막골'을 보았다. 그곳은 평화로운 '숲의 나라'요, '물의 나라'였다.
 
나의 이 걷기실험은 행복했다. 나는 사람들이 왜 두발로 걷고, 뛰고, 오르는지 이제사 알 것 같다. 그것은 일상과 욕망에 찌들어 돌아 보지 않는 '나'에게로 찾아가는 여행이다. 마음이 번잡하고 바쁠수록 걸어야 한다.



'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는 2권짜리 책을 쓴 한의사 김영길 씨. 이 양반도 별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서울대 천문학과를 나왔지만 백범사상연구소에서 재야운동을 했고, 끝내는 한의사가 됐다.

그렇다면 목 좋은 곳에 한의원을 내는게 당연하겠지만 그는 그걸 강원도 오지인 방태산 깊은 산골에 차렸다. 거기서 매일 산을 타고, 약초를 캐고, 냉수욕을 한다.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 다달아 아름아름 찾아오는 불치병 환자들을 맞는다.
 
그런데 그 치료라는 것이 '걷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게 없다. 그는 다리가 부러진 골절환자가 아니라면 무조건 걷도록 한다. 걸어가든 기어가든 매일 아침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1000m)에 있다는 개인산 약수터까지 올라가서 약수를 마시고 오게 한다.

그에게 걷기는 만병을 다스리는 처방전이다. 그것은 거의 '신앙' 수준이다. 그의 책에는 이런 식으로 걷게 해서 죽음의 문턱에서 회생시킨 기적같은 얘기들이 펼쳐진다.

하지만 걷는 것이 몸의 병만 고치는 것은 아니다. 세속에 찌든 습성과 욕망으로 가득찬 마음의 병을 다스리지 않고는 온전히 몸의 병을 고칠 수 없다. 걷는 것은 몸을 먼저 닦고 마음을 닦는 자기수양(先命後性)의 한 방편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쓸데 없는 것을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듣고, 너무 많은 말을 한다. 빠르고 많은 정보를 원하고,그걸 돈으로 여긴다. 시시콜콜한 남의 얘기로 가득찬 정보의 홍수 속에 산다. 그러나 정작 자기는 살피지 않는다.

 
나를 평가하는 '남'에게 비쳐진 허상이 내 안에 있는 진짜 '나'보다 더 중요하다. 나의 가치와 소득을 정하는 곳은 시장이고, 그 시장에서는 모든 것에 값을 매겨 사고 판다. 그래서 주변엔 온통 '시장주의자'들이 넘쳐난다. 그 시장에서 '나'는 상품일 뿐이다.
 
그러나 두발로 걸을 때 나는 나와 대화하고, 진짜 '나'를 돌아본다. 걷고, 달리고, 오르는 것은 똑같이 두발로 한다. 반드시 한발짝씩 내딛는다는 점도 같다. 남이 대신해 줄 수도 없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달리는 것은 '더 빨리', 오르는 것은 '더 높이' 가려 하지만, 걷는 것은 '더 오래, 더 천천히' 가려 한다. 달리는 것은 '목표지점'을, 오르는 것은 '정상'을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지만 걷는 것은 걷는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 달리고 오르는 것은 땀과 인내를 요구하지만 걷는 것은 여유와 평화를 요구한다. 이른바 '느림의 미학'이다.

나는 매일 걷는다. 주중에는 회사 근처 헬스장에서, 휴일에는 동네에서 걷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걷고, 아침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걸으려 한다. 일주일에 4번 이상, 한번 걸을 때 40분 이상, 4km 이상을 걷는다. 이른바 '4-4-4 룰'이다.

걸을 때는 아무 생각없이 걷는다. 내 몸의 나쁜 기운들을 내보내고 잡다한 상념들을 가라앉힌다. 가끔씩 '무념'에서 '무아'를 느낀다. 그렇게 3년 넘게 걷는 동안 체중은 11kg이 줄었다.

그러나 더 큰 변화는 내 안에서 일어났다. 나를 느낀 것이다.
걷는 것,
그것은 '자기혁명'의 시작이자, 공짜로 행복을 느끼는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