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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밥상을 다시 차리자 1

들바람 2007. 1. 4. 02:33

생태영양의학에 올린 글은 인터넷

다음 카페 http://cafe.daum.net/babmommam 에 있는 글을 옮긴 것입니다.
김수현님의 '밥상을 다시 차리자'라는 책 내용 전체임. 저자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제 1 장 주부들의 고민


 

보리밥을 심었던 시절

 

보리혼식을 권장했던 시절 도시락 검열은 선생님이 무서워 살떨리는 시간이었다. 걸리면 불필요한 야단과 훈계를 들어야 하고, 화장실 청소라도 해야 하고, 마룻바닥 광내는 일이라도 해야 했으니 말이다.

요즘 아이들은 선생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선생님이란 존재 자체를 무서워했던 것 같다. 혹시라도 엄마가 잊으신 게 아닌가 걱정하며 초조하게 도시락을 열어보았던 그 기억은 요즘의 아이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할 추억거리이다.

엄마가 혼식하는 날을 잊어버려 도시락이 온통 하얀밥이면 친구들한테 콩도 빌려오고 보리도 빌려와 도시락에 심었던 기억이 이젠 아련하다. 혼식을 해야 하는 이유도, 부모가 왜 흰쌀밥을 주는 줄도 모르고 주는 대로 먹어야 했던 그런 시절이 지금에 와서 이렇게 식생활을 돌아보는 이야깃거리가 될 줄은 몰랐다.

가정시간 씨눈 떨어진다고 쌀은 박박 문질러 씻지 말라고 배웠던 그 가르침이, 씨눈 하나 찾아볼 길 없는 요즘의 밥상을 맞는 아이들에게도 유효하게 전달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래도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도시락 검열을 하는 날만 잡곡을 먹으려 했던 것을 보면 전후 세대들이 먹었던 시래기죽이나 꽁보리밥, 옥수수밥, 고구마밥의 지겨운 기억을 가진 세대는 아닌 것 같다.

한때는 잡곡의 혼식과 밀가루의 사용을 장려하고, 이제는 흰쌀보다 현미의 가격을 더 비싸게 방치하는 정부의 정책을 탓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렇게 부실한 사람으로 커왔던 것에 대해 부모의 탓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어쩌면 당연히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단지 내가 먹을 것은 내가 선택한다는 그런 단순함이 존재하질 않는다. 식생활을 둘러싼 모든 사회, 환경적 요인은 단지 내 개인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을 뛰어넘어 아주 긴밀하고 집요하게 연관되어 있다.

현대에는 식품가공의 기술이 발달하고 산업화함에 따라 식품회사의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인해 우리의 판단은 쉽게 흐려지고 잘못된 지식과 정보는 확대, 재생산된다.

현미 잡곡밥은 이제 더 이상 환자들의 식사가 아니고 모든 이들의 대의명분이다. 밥은 우리에게 주식이다. 주식을 어떻게 먹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섬유질이 제거되고 씨눈의 영양이 결핍된 식사를 하며 키워왔던 만성질환과 원인 모를 질병들의 증가 앞에 우리는 잘못된 식생활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한다. 평생 동안 통곡식의 씨눈과 섬유질을 먹은 사람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의 건강상태는 절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한부분으로 일상적이며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식생활 습관들은 인격의 수위와 건강의 질 모두를 바꾸어놓는다.

씨눈의 필수영양이 제거되고 신체의 정상적인 대사와 배설의 수준을 조절하는 섬유질이 없는 식사는 더 이상 밥이라 하지 말자. 처음부터 완전 통곡식의 식사가 어려운 집은 잡곡을 고루 섞어 그 비중을 차츰 늘려나가면 된다.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습관을 만들어가는 것이고 습관의 결과는 삶의 질을 다르게 만든다. 올바른 식생활 또한 바른 정보와 지식, 실천의지로 식습관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매일 주식으로 현미잡곡밥을 먹는 식습관을 기르면 결과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대형 냉장고에 갇혀버린  영양

 

 

30대 주부들은 대체로 결혼 5년에서 10년을 맞게 된다. 우리나라 가전제품의 수명이 짧아서인지, 아니면 계속 덩치자랑을 하는 가전제품 때문에 결혼 당시 유행했던 작은 냉장고가 초라해서인지 이쯤 되면 냉장고를 바꿀 생각을 하게 된다.

아내에게 선물로 주고 싶을 정도로 남편의 사랑을 반영한다는 광고 카피가 부추기듯 문 두 짝 달린 대형 냉장고의 꿈은 남편의 사랑을 등에 업고 주부들의 입가에 날개를 편다. 그렇게 누군가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또 누군가는 초라한 냉장고를 부둥켜안고 별 기쁨 없이 살아가는 일상의 주부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생활이 30, 40대 주부들의 삶이라면 너무 과장했다고 할까.

가전제품이 왜 유행을 타야 하는지 슬픈 현실이지만 이제 그 유행 지난 작은 냉장고에 감사해야 할 때이다. 작은 냉장고를 쓰던 엄마들은 한꺼번에 많이 사두면 보관할 곳이 없어 매일매일 다리품을 팔아 장을 봤다. 그리고 그 덕에 엄마의 다리는 건강해지고 우리의 식탁은 좀더 신선하게 꾸며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일부러라도 큰 냉장고가 필요없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작은 냉장고가 있음을 자랑해야 한다. 요즘같이 김치냉장고의 등장으로 가장 덩치 큰 김치통을 빼내고 난 냉장고는 더욱 커질 필요가 없어졌다. 엄마를 편하게 하는 모든 장치들이 밥상을 잘못 차리게 하고, 그로 인해 아이들도, 남편도 병들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파트와 같이 통기가 잘 안 되고 햇빛이 잘 비치지 않는 곳에서의 생활이 큰 냉장고의 필요를 부추긴 측면도 있다. 아파트에서는 바람이 없고 햇빛이 없는 덕에 고추장을 담가도, 된장을 담가도 제맛이 안 난다. 아파트의 따뜻한 기온에 곡식과 채소들도 너무 쉽게 시들해버린다.

큰 냉장고가 필요하지 않다고 강조하는 것은 식품을 오래 보관하지 말자는 역설이다. 더구나 기름기가 들어 있는 식품은 냉장고 안에서도 산화되기 쉬우며, 과일과 채소도 보관하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비타민 보유량은 계속 감소하기 때문이다.



부패는 막아도 산화는 못 막는다!

 

 

냉장고 냉동실 구석에서 발견된 좀 오래된 고깃덩어리로 국을 끓여보면 참 맛이 없다. 하지만 동네 정육점의 소잡는 날에 산 생고기로 국을 끓였을 때는 정말 비교되지 않는 맛이 난다.

현대인의 바쁜 생활로 인한 대형 할인마트의 애용은 집안의 작은 냉장고를 자꾸 초라하게 만들고, 30대 주부의 최고 선물이라고 불려질 만큼 대형 냉장고들이 인기를 누리게 하고 있다. 하지만 냉동보관의 문제를 지적하는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혼수용품으로 냉장고만큼은 작은 것을 구입하라고 충고한다.

식품의 유통, 보관과정에서 세균의 번식을 철저히 차단하고 부패를 막는 일은 중요한 과제다. 합성 방부제의 사용과 냉장고의 보급으로 부패된 음식의 문제는 대체로 여름철 식품과 대규모 단체급식에서 국한되어 발생하곤 한다.

음식물의 변질은 대체로 그 속에 함유된 단백질과 지방의 변화를 말한다. 식품의 부정적 변화에는 세균의 번식을 말하는 음식의 부패뿐만 아니라 음식물의 맛의 변질과 향의 손실, 결정적으로 건강에도 영향을 미치는 단백질의 변성과 지방의 산화가 포함된다.

냉동보관으로 세균의 번식을 막아 부패를 막음으로써 식품의 보존기간은 늘릴 수 있다. 하지만 냉동실 안이라 할지라도 산화는 막지 못한다. 산화라는 것은 식품 속의 식물성 기름이 공기 중의 산소와 반응하여 변질되는 것으로 지방 변성의 가장 큰 원인이다.

단백질과 지방 모두 고온·고압·산·알칼리 처리에 의해 그 고유의 성질이 변성된다. 그리고 또 지방은 냉동실의 산소로도 얼마든지 쉽게 변질될 수 있다. 대부분의 단백질 식품은 지방을 함유하기 때문에 취급상에서는 똑같이 주의해야 한다.

고기와 생선, 견과류, 씨앗류 등의 냉동보관은 부패를 막아 오랜 시간 사용할 수 있는 것들로 취급되어져왔다. 하지만 그 맛은 현저히 다르다. 그것은 바로 지방의 맛이 바뀌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지방의 산화이다. 산화된 지방을 일컫는 과산화지질은 암의 발생을 촉진하는 발암물질이다.

신선한 식용유로 튀겼을 때와 한 번 튀긴 기름으로 한참이 지난 후 다시 튀겼을 때와의 튀김맛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이는 맛의 변화뿐만 아니라 기름의 고유한 상태가 변했기 때문에 더욱 건강상의 문제를 일으킨다. 이렇게 변질된 지방식을 하게 될 경우 세포의 구조가 달라지고, 호르몬 생성에도 차질을 빚어 체질 자체가 달라짐으로써 알레르기와 면역질환을 일으킨다. 지방의 산화물인 과산화지질은 강력한 발암물질로 암 발생률을 증가시킨다.

우리는 너무나도 기름의 사용, 기름이 들어간 음식의 취급을 소홀히 해왔고 이미 많은 냉동식품에 익숙해져 있다. 고기를 사다가 충분히 얼려놓고, 생선 또한 오랜 시간 얼렸다가 먹곤 한다. 참깨, 들깨, 호두, 땅콩 등도 몸에 좋다는 이유로 일 년분을 보관하는 경우도 있다.

모든 음식은 제철의 자연식품을 그때그때 바로 구입해서 되도록 짧은 기간 안에 먹는 게 가장 좋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고 구하기 어려운 음식이라고 해도 보관해두고 일 년 열두 달 먹는 것은 진정한 건강을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식탁에 부는 복고의 바람, 절제의 바람, 최소주의들은 풍요로운 시대에 반대급부적인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인류가 전적으로 자연친화적인 환경 안에서 살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고, 모든 생태계와 더불어 공존하기 위한 궁극적 모색 속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식생활의 커다란 변화 중 하나는 지방 섭취량이 급속하게 증가하는 데 있다. 수렵과 농경시대에 비해 2배가 넘는 지방을 섭취하기 시작한 것은 약 100여 년 전부터의 일이다.

과학의 발달과 함께 밝혀지고 있는 식품과 지방연구에 관한 보고들은 지방을 함유한 식품에 대해서 충분히 유의하며 다루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급격한 식생활의 변화와 늘어나는 만성질환들 속에 지방섭취를 줄이는 노력들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냉동한 육류의 보관은 일 주일분을 넘기지 말고, 고등어·삼치·꽁치·청어 등 불포화지방산의 함량이 높아 변질되기 쉬운 등푸른 생선의 냉동보관은 삼가는 것이 좋다. 또한 호두, 땅콩, 잣 등은 냉동실에 오래 보관하지 말고 되도록 신선한 상태에서 먹도록 한다. 냉동기간이 길다고 우려되는 수입육, 수입 견과류, 볶아서 소금 뿌린 땅콩·아몬드 등의 섭취는 절대 삼가야 한다.

식품은 제철의 것으로 조금씩 구입해 유통과 보관기간을 최대한 단축시키고 요리시간 또한 최대한 줄여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전자레인지,  그 처량한 신세

 

 

외국의 전자레인지를 비롯해 가전제품들은 심플, 단순 그 자체인 것이 많다. 물론 아닌 것도 있겠지만 단순하고 필요한 기능만을 필요에 따라 선택하는 그들의 합리성이 돋보인다. 우리도 실제 가전제품을 사용하다보면 그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가전제품의 특별한 기능들을 복잡한 메뉴얼을 읽어가며 모두 사용할 만한 여유가 없다.

그런데도 막상 구입할 때는 그래도 신형, 그래도 다기능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현재 모습인 것 같다.

전자레인지 또한 그런 식의 구입을 하게 되지만 정작 크게 쓸 일이 없다. 세상이 온통 전자파의 위험성으로 들먹거릴 때 가장 큰 타깃이 되었던 게 전자레인지이다. 전자레인지를 열고 닫을 때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등 전자파의 피해를 줄이는 방법들이 속출했다.

그런데 요즘은 신체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전자파를 쏘아대는 귓전의 핸드폰 이용이 광범해서인지 전자파 논란이 뜨악한 것 같다.

전자파의 위험이란 그 파장이 물질의 변화를 일으켜 고유의 속성을 잃게 하거나 극히 불안정하고 파괴력이 강한 활성물질들을 만들어 또 다른 물질을 파괴하는 상태가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전자파가 신체에 미치는 직접적인 피해를 좀더 확대해보면, 전자파를 받는 식품의 성질 또한 변화하게 되고 그런 변질된 식품을 먹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불포화지방산이 많은 기름이 들어 있는 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돌렸을 경우 말론디알데하이드라는 발암물질이 60배까지 증가한다고 한다.

전자레인지의 사용은 직접적인 전자파의 피해 때문에라도 줄여야 하지만 사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식품의 변화가 더 큰 문제이다. 이렇게 문명의 발전은 우리에게 편리를 안겨준 만큼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전자레인지를 구운 고기와 부침을 데워 먹는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즉 기름을 많이 함유한 식품은 전자레인지 사용을 피해야 한다. 그래도 변질이 안 되는 탄수화물 식품, 단시간에 고열로 조리해야 영양이 보존되는 식품, 물을 데우는 기능, 스팀 타월을 만드는 기능 등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갓 구워낸 빵’의 허상


 

갓 구워낸 빵은 입에서 살살 녹는다. 그 부드러운 밀가루에 버터와 설탕, 그 사이에 생크림이라도 바르면 더할 나위 없는 부드러운 유혹이 된다.

요즘은 빵 나오는 시간을 알려주는 타임 서비스도 한다. 또 반은 조리되어 냉동상태에서 운반되고 즉석에서 살짝 구워냄을 자랑하는 냉동생지빵도 고객의 호응이 좋다. 하지만 조리과정과 유통과정이 길어지는 동안 첨가물의 양이 늘어나는 것이 건강상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장인정신 하나 없는 빵집 주인의 편리와 고객의 신선함을 위하여 그렇게 냉동생지는 확산되고 있다.

어디에서 영양을 찾을 수 있겠는가. 도정되고 표백된 수입 밀가루 속에서, 계량컵으로 쏟아붓는 설탕과 버터 속에서, 유통과정중 부드러움을 유지하기 위해 첨가되는 그 숱한 첨가물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부드러운 유혹경쟁을 넘어 이제는 갓 구워낸 신선도 경쟁이다. 밥도 바로 지으면 맛있고 당연히 빵도 새로 구워 바로 나오면 맛있다. 모든 음식이 갓 조리해서 나오면 맛있다. 그래서 요리 잘하는 부인, 부지런한 부인을 맞아 따근한 밥을 먹을 수 있는 남편은 평생이 행복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니, 뜨거울 때 먹어라, 식으면 맛이 없다는 어른들의 말 또한 틀리지 않다.

맛있음의 경쟁…… 이 미식의 경주는 또 어디까지 펼쳐질까.

‘갓 구워낸 것’의 의미는 무얼까. ‘갓 구워냄’을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신선해서 맛있으며, 영양도 살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안이한 착각에서 나온 게 틀림없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신선하게 구워낸 빵에 사용된 밀가루가 태평양을 건너오느라고 몇 년이 걸렸어도, 1년 전 만들어낸 버터와 소금과 설탕으로 뒤범벅이 되어도 빵으로 바로 구워내기만 하면 신선하다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앞뒤 분간 못 하는 사람과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선함은 땅 속에서 뽑아올린 지 얼마나 되었는지, 나무나 줄기에서 꺾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또 그 열매를 딴 지 얼마나 되었는지, 바다에서 언제 잡은 생선인지, 낳은 지 얼마나 된 달걀인지, 소와 돼지라면 목이 매달린 지 얼마나 되었는지…… 이런 것 이외에 표기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갓 구워낸 것’의 정체는 ‘갓 딴’의 비평을 받아야 한다. 갓 딴 신선한 식품을 우리는 얼마나 먹을 수 있는가. 하지만 우리는 절대적 가치기준보다 상대적 평가에 더 의미를 두고 살아간다. 최대한 신선함을 지키자는 노력일 것이다.

자연에서 돋아나고 바다에서 건져올린 싱싱함, 막 피어나는 새순에는 영양이 넘친다. 콩에 거적을 덮고 물을 주면 자라나는 콩나물에는 비타민C와 항산화 영양소가 다량으로 증가한다. 숙주나물이 그렇고 무순이 그렇다. 돋아나는, 생명이 잉태되는 그 시점의 영양이 가장 큰 것이다.

펴보지도 못하고 시드는 꽃잎처럼 우리의 아이들이 시들고 있고 중년의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남편들이 쓰러지고 있다. 인간의 감각기관만을 자극하며 유혹하는 그 현란한 말들의 유희! 정신을 차려도 코 베어가는 그런 세상에 우리는 있다. 그럴 듯하고 근사하게 보임과 달콤한 유혹과 신선한 착각의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날파리 하나 살지 못하는 우리 집 밀가루

 

 

그 옛날의 밀가루 봉지에서 튀어 날아오르는 날파리에 소스라치던 기억이 아득하다. 우리는 그것이 더러운 곳에 곰팡이가 피듯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했다.

뛰어난 방부효과를 자랑하며 나온 흰 밀가루는 벌레도 살지 않고 상하지도 않는 좋은 것이라고 극찬했다. 아니, 어쩌면 긴 시간 동안 서서히 이루어졌던 식품의 변화에 대해 당연한 문명의 혜택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버리고 말았던 것 같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이 성장하고 번식할 수 있는 곳, 영양과 환경이 충분히 따라주는 곳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날파리가 밀가루 속에서 날아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 당시의 밀가루라는 것에 생명을 부지할 만큼의 영양성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땅의 생명체들과 더불어 살게 되어 있다. 사람은 죽어서 한 줌의 흙으로 된다고 했다. 우리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도 세균과 박테리아에 의해 일어난다. 모든 식물체가 땅 속의 무기물을 흡수하여 유기물로 만드는 과정도 미생물의 도움으로 일어난다. 우리는 또다시 그 유기물을 먹고 살아가며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물질순환에 함께 한다. 그 순환의 고리를 연결했던 미생물을 우리는 과학과 문명의 발전이라는 그 청결한 이름으로, 항생제와 농약, 합성 살균제와 방부제의 이름으로 모두 죽이려 해왔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여지도 주지 않았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그의 저서 《생명의 그물》에서 모든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을 통합하는 새로운 사고의 패러다임을 주장하고 있다. 인간의 질병은 육체와 정신과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자연이라는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하며, 생태계 전체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는 어떤 질병의 치유도, 건강도 보장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땅의 생태계를 이루는 한 생명체로서 함께 공존하며 살아간다. 내가 살아가는 환경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하찮은 동물과 미생물까지도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태학적 세계관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만이 눈앞의 이익만을 앞세워 함께 살아가는 터전을 서슴없이 훼손하는 일들을 저지르지 않게 할 것이다.

밀이라는 통곡식을 껍질을 벗기어 부드러운 전분질 식품으로 만들고, 더 큰 상품가치를 위해 표백을 하고, 보존기간을 늘려 유통에서 승리하고자 방부처리하는 과정 중에 대부분의 영양소는 모두 파괴되어 없어지게 된다. 수입 밀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또 요즘 맛을 좋게 만든 부침가루, 튀김가루 등도 맛을 내기 위한 더 많은 화학 첨가물의 집합소이다.

밀가루의 영양이라는 것이 이렇게 불완전한 과정을 거쳐 우리 집, 우리 식탁 위에 오르게 된 것들이다. 섬유질도 없고, 영양도 없는 이런 밀가루로 만든 빵과 과자와 라면과 가공식품이 우리의 신성한 아침을 점령하고 아이들 간식의 주멤버가 되어 있다.

흰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절대 우리의 주식이 될 수 없다. 외국 사람들은 빵도 먹고 잘 살지 않느냐는 항변도 많이 듣지만 밀가루 음식이 우리의 주식이 되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곡채식 민족인 동양 사람들은 섬유질이 풍부한 식사를 하며 살아왔다. 대부분 수입 밀을 사용하고 있는 밀가루 음식은 섬유질이 제거되어 있고, 식품 자체를 대사시키는 데 필요한 영양소도 파괴되어 있다. 또한 밀가루 자체가 방부제, 표백제, 붕해제 등 화학 첨가물의 집결지인 가공식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밀은 도정하지 않은 우리의 통밀로 잡곡의 한 종류로서 사용되어야 하고, 가루가 필요한 음식은 통밀을 가루내서 사용하고 그 유통기간도 짧아야 한다.

수입 밀가루가 빵이 되어버리면 그 문제는 더 심각하다.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설탕과 소금과 버터가 들어가야 한다. 요즘의 빵은 더욱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온통 첨가물과 가공기술이 동원된다. 설탕의 함량 또한 15∼20%를 차지하고 있다. 간이 안 된 음식은 참으로 맛없게 느껴지며 설탕의 맛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해선 소금의 첨가가 필수적인데, 나트륨의 함량은 거의 밀가루보다 60배 이상 증가한다.

이렇게 미네랄의 밸런스를 어지럽히고 섬유질이 제거된 상태에서 설탕과 화학 첨가물이 다량 첨가된 빵이 주식이라면 먼 훗날의 건강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빵을 주식으로 삼는 나라의 경우 우리나라와 같이 빵의 개념이 달고 부드럽고 달콤하지만은 않다. 중국의 꽃빵이 그렇고 프랑스의 바게트가 그렇고 미국의 베이글이 그렇지 않은가. 그들의 빵은 달지 않고 거칠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들의 식품도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집에서 밥을 짓듯이 집에서 손수 만든 것들이었다.

통밀을 사용하지 않고, 설탕과 버터가 범벅이 되고, 화학 첨가물로 목욕한 빵을 더 이상 빵이라고 부르지 말자. 빵은 좋은 먹거리가 될 수도 있지만 건강을 해치는 주 원인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큰 식품이기도 하다.


 

분리수거하는 날 자랑스런 PET병

 

분리수거하는 날 가정에서 배출되는 그 자랑스런 PET병의 양은 만만치가 않다. 예전에는 분명 1.5리터 콜라병과 음료수병들은 야외용이었다. 어디론가 단체로 야유회라도 간다든지, 먼길 여행에서 나누어 먹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청량 음료수들이 가정의 냉장고에도 버젓이 들어앉아 마실 물의 자리를 밀어내고 있다. 늘어나는 대형 할인점과 식음료 업체의 공격적인 마케팅은 대용량의 청량음료 사용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콜라의 짜릿함, 그 톡 쏘고 찌르는 상쾌함에 길들어져버리면 그 맛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톡 쏘는 맛을 위해 강화된 인산과 설탕과 그 속의 카페인, 코카인과 같은 중독성 물질 때문이다. 피자를 먹고, 햄버거를 먹고, 치킨을 즐기는 이상 콜라의 개운함은 세트로 쫓아다닐 수밖에 없다. 느끼한 음식에 콜라만큼 제격인 음료수가 없기 때문이다. 패스트푸드 식품의 이용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청량음료의 사용 또한 함께 늘어날 수밖에 없다.

콜라에는 13%의 설탕이 들어 있다. 한 번에 200ml의 콜라를 마셨다면 26g의 설탕을 먹게 된다. 요즘 피자 한 판 시키면 콜라는 서비스되는 곳도 있다. 피자를 먹다보면 콜라 한 병 다 마시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을 보면 우리는 엄청난 양의 설탕과 카페인을 먹고 있는 것이다.

어릴 적에 커피는 머리에 나쁘다고 부모들이 주지 않았다. 커피의 카페인을 두고 한 말이라면 콜라의 카페인은 어쩌란 말인가. 콜라의 문제는 설탕과 인산에 있다. 섬유질이 결핍된 아이들에게 설탕의 과다 섭취는 저혈당을 유발하여 정신상태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며, 면역세포가 싸울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한다.

콜라에 치아를 담가두면 치아가 변색되고 녹아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콜라의 인산은 미네랄의 밸런스를 깨뜨려 칼슘을 용해시켜버린다. 콜라를 먹어야 하는 이유는 영양도 의미도 없는 쾌감과 중독성 때문이다. 쾌감을 쫓아가는 인간의 탐닉현상은 이 세상이 통째로 없어질 그날까지 일어날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과감히 중독의 고리를 끊어야 할 때가 되었다.

온갖 색소와 첨가제가 난무하는 시판 음료를 더 이상 음료수라 부르면 안 된다. 이건 비상식품이다. 물을 구할 수 없는, 또는 당장 설탕과 카페인을 통해서라도 각성작용이 필요할 때 집 밖에서나 급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지 우리 집, 우리 냉장고에서 언제나 먹을 수 있는 음료수가 아니다. 우리 집 냉장고에서부터 청량음료를 몰아내야 한다.

 

 

김장철 밭에 나뒹구는 푸른 배춧잎

 

한겨울 우리의 양식, 김장김치를 만드는 배추는 갈수록 노래지고 있다. 연두색의 잎도 거의 찾아볼 길 없고 푸른 잎은 거의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배추김치는 그 하얀 자태를 더해가고 있다.

갈수록 질긴 것을 싫어하는 현대인의 취향과 섬유질에 대한 기존 영양학의 평가절하가 더욱 무참히 푸른색의 배춧잎들을 처단해버렸다. 엽록소의 광합성 작용을 차단하여 부드럽고 노란 배춧속을 만들기 위해 수확 직전 배추밭의 배추들은 포기포기 동동 묶어져 그 숨을 할딱이고 있다.

모든 식물체는 태양 에너지를 받아 화학 에너지로 바꾸어나가기 위한 엽록소를 가지고 있다. 엽록소는 우리가 채소를 푸른색으로 알아보게 하는 색소이다.

이런 색소의 합성이 저하되면 식물의 전분질과 섬유질의 합성은 더디게 일어난다. 물론 비타민의 합성도 저하된다. 햇빛을 받지 못하는 푸른잎 채소들은 섬유질 합성과정이 덜 일어나 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이나 부드러운 유혹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동동 묶여진 노란 배추와 그 찬란한 햇빛도 제대로 스미지 않는 비닐 하우스의 얌전한 채소들을 노지의 푸른 채소와 널브러진 푸른 배추잎보다 더 맛있게 느끼고 있다. 20년 전이나 30년 전과 똑같은 배추와 채소를 먹고 있는 것 같아도 그때의 배추가 아니고 그 시절의 채소가 아닌 것을 맛있다고 먹고 있는 것이다. 품질경쟁과 대량 생산을 위한 화학농법과 농약의 범람이 이렇게 우리를 영양의 불균형으로 몰아넣고 서서히 질병과 죽음으로 안내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수만 년 전부터 자연 속에 널려 있고 제철에 돋아나는 그 질깃한 산속의 풀들을 먹지 않았는가. 정작 산속의 산나물이 아니더라도 햇빛과 자연의 혜택으로 성장한 유기농의, 제철의 채소를 먹기 위한 의식과 운동은 확대되어야 한다.


 

그 짭조름한 자반이 맛있을지라도……

자반 고등어에 맛이 들린 사람은 신선한 생물 고등어가 옆에서 펄떡이고 있어도 자반을 산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 때문인지 어떨 때는 자반이 더 비싼 경우도 있다.

자반 생선이나 말린 생선은 내륙과 산간벽지로 유통이 불가능한 시대에 바다의 혜택을 받지 못한 육지 사람들을 위한 보관과 유통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정말 생선 한 마리에 젓가락 전쟁이 날 정도로 생선이 귀한 시대의 일이었다. 누구나 먹을 수 없었고 귀했기 때문에 지금 지적하려고 하는 점이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널린 것이 자반이고 냉동이고 말린 생선들이다. 유통과정이 개선되면 불필요했던 저장과 보관과 조리방법도 달라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무서운 습관과 관행이라는 병이다.

DHA, EPA라는 불포화지방산이 많은 고등어, 삼치, 청어, 꽁치 등은 가장 산패되기 쉬운 영양소를 가지고 있는 식품이다. 고등어에서 나는 비린내의 원인이 그것이다. 싱싱하지 못한 생선으로 조리하면 그 맛도 떨어지는 것은 지방의 변질에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가장 맛없는 음식을 싱거운 음식이라고 느끼듯 우리는 짭조름한 자반의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부패를 막기 위한 저장수단이었다. 영양과 맛을 살리려고 소금을 뿌려 말렸던 것이 절대 아니다.

지방의 섭취가 늘어나는 현대에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지방의 산화에 의한 발암물질의 생성이다. 고도의 불포화지방산을 다량 함유하고 있는 생선을 말리거나 냉동하여 보관해두었다 먹는 것은 자살골을 넣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흰살생선보다 기름이 많은 생선, 등푸른생선은 더 빨리 산패되므로 싱싱한 생물로 구입해서 먹어야 한다. 생물이 비싸서 그렇다면 두 번 먹을 것 한 번만 먹자!

미국 텍사스주립대 의대 노화 연구소장인 유병팔 교수가 했던 재미있는 표현을 옮겨보면 이렇다. “혀는 문앞의 경비원이다. 경비원이 주인이 되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더 이상 혀의 황홀함만을 쫓아가지 말자.

문명의 발달로 공급이 원활한 시대, 이젠 얼마나 많이 먹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콩비지의 향수

 

과거의 콩비지는 식량이 부족했던 시절 어떤 식품의 부산물도 남김없이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먹었던 음식이다. 하지만 요즘은 콩 전체를 맷돌에 갈아 만드는 콩비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유행하는 콩비지 백반은 그 옛날의 콩비지의 향수보다 더 고소하고 맛있다.

예전의 콩비지는 두부를 만들기 위해 두유를 짜고 남은 부산물, 쓸모없는 섬유질, 절약의 차원에서 먹었던 것에 비해, 콩 전체를 갈아 만든 요즘 먹는 콩비지는 영양과 맛으로 먹게 된다.

콩은 식물성 단백질과 레시틴과 같은 인지질, 올리고당 상태의 복합 탄수화물, 충분한 칼륨과 섬유질이 함께 들어 있는 완벽에 가까운 식품이다.

콩에 풍부한 레시틴이라는 인지질은 인체 내 생체막의 구성성분으로 세포 안팎에 물질들이 원활히 이동할 수 있게 해주고, 신경전달 물질의 원료로 사용된다.

콩 안에 들어 있는 올리고당은 장내 세균의 먹이가 되어 산성물질을 만들어내고 유해균의 번식을 억제하여 장을 건강하게 해준다.

콩에는 인내심과 지구력, 정신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작용에 관여하는 망간과 실리카가 풍부하다. 그래서 육고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공격적인 성향을 띠는 데 비해 콩류를 비롯한 식물성 단백질로 성장한 아이들은 차분함과 인내심을 키우게 된다.

콩은 육류를 대신해 단백질을 보충하는 목적으로만 먹는 게 아니다. 육류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섬유질이 풍부하고 필수지방과 미네랄이 풍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이라는 것이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어서인지, 육류에 비해 촌스러운 식품이라고 느껴서인지, 아니면 수입 콩에 대한 논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진가가 충분히 알려지고 널리 사용되고 있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콩비지는 불린 콩에 물을 조금 부어 갈아서, 무나 감자 등 각종 채소를 넣어 익힌 뒤 약간의 양념간장을 하여 아이들의 간식으로 사용해도 좋다. 또한 김치나 무를 넣고 국이나 찌개로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또 콩은 콩국을 만들어 마실 수 있고, 섬유질이 껄끄러워 먹기 어려우면 처음부터 거피를 하든지, 아니면 다 만들어진 콩국을 베보자기 등에 걸러 두유를 만들어 먹어도 좋다. 콩국도 똑같은 과정으로 불린 콩을 약간 삶아 물의 농도는 취향에 맞게 하고 믹서로 갈아 마시면 된다.

콩은 예부터 널리 사용되어왔던 식품이다. 그 긴 세월 동안 검증된 안전한 식품이고 완벽한 식품이다. 30년을 먹었던 콧물감기약 콘택 600이 하루아침에 부작용으로 생산과 판매가 중단되는 게 현실이다. 우리가 예부터 먹어왔던 음식들은 그 어떤 과학적 장비로도 안전성을 검증할 수 있는 그런 안전한 먹거리들이다.

콩으로 만든 콩비지, 콩국, 두부, 순두부, 연두부, 콩나물, 콩자반, 된장, 청국장 등 우리는 콩의 진가를 조상 대대로 알고 있었고, 우리 몸은 그런 것들에 적응되어 있다.

그렇게 우리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던 콩이 아이들에게 왜 이렇게 외면을 당하고 있는 걸까? 콩 좋아하는 아이가 별로 없고, 밥에 콩이라도 들어 있으면 콩을 골라내느라 정신이 없다. 이는 어려서부터 씹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고, 고기와 지방과 설탕맛에 먼저 빠져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콩은 우리의 주식인 쌀에 결핍된 아미노산을 함유하고 있는 식품으로, 콩밥은 그 필연적인 만남의 이유가 있다. 아니, 잡곡 전체가 영양학적으로나 한의학적 음양의 이론에 비추어 보았을 때 서로의 문제들을 보완하는 식품들이다. 여기에 여러 가지 통곡을 섞어 먹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또한 콩, 콩, 콩 해야 하는 이유도 충분히 있다.

누구나 콩을 좋아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버섯은 면역훈련 식품

 

 

표고, 송이, 양송이, 느타리, 팽이, 목이버섯 등은 우리 주변에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버섯류이다. 버섯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영양의 효과를 잘 몰라 외면하는 경우도 많다. 버섯류 식품의 유행은 양식을 통해 그 향과 맛과 영양을 충분히 살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훌륭한 역할을 해내는 기능성 식품인 것만은 틀림없다.

버섯의 효과는 그 속에 함유한 다당체 때문인데 이는 수용성의 식이섬유를 말한다. 이 다당체는 혈액에 들어와 콜레스테롤을 흡착 배설하고 당분의 흡수속도를 조절하며 면역세포를 훈련시킨다. 따라서 혈액을 맑게 할 뿐만 아니라 면역기능을 높여주므로 만성·퇴행성 질환에도 널리 상품화되어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매일 먹는 버섯의 부위는 버섯의 몸뚱어리인 자실체인데, 균사체보다 영양이 좀 떨어진다고 해도 자실체를 매일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곡식의 씨눈처럼 영양의 농축을 자랑하며 버섯의 균사를 상품화한 버섯 균사체 식품도 많이 선보이고 있다. 영지 균사체, 표고 균사체, 운지 균사체 등이 그것이다. 고가의 제품들은 약으로 섭취하면서 식탁 위에 버섯올리기를 게을리한다면 이 또한 어불성설이고 건강을 만드는 주인으로서의 자세는 아닐 것이다.

자연적으로 성장시킨 버섯류 식품을 즐기는 것은, 면역기능의 대혼란을 맞고 있는 현대인에게 소중한 기능성 식품을 섭취하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준다. 다양한 버섯들로 버섯부침, 버섯채소볶음, 버섯찌개, 버섯된장국 등 그 맛과 향과 영양을 잘만 응용한다면, 버섯은 활용범위도 넓고 구하기도 쉽고 요리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식품이다.




포테이토칩은 감자가 아니다

 

우리의 주식이 밥이라면 미국인들의 주식은 감자와 고기다. 그들은 정말 감자를 많이 먹는다. 프렌치프라이, 베이키드 포테이토, 매시 포테이토 등 튀긴 감자, 통으로 구운 감자, 으깬 감자 등 다양한 감자요리법이 있다. 그리고 가끔씩 미국 사람들이 감자칩으로 된 과자를 들고 다니며 먹는 것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국내 감자칩과 수입 감자칩이 많이 시판되고 있고, 그것들은 아이들과 청소년들의 중요한 간식 메뉴로서 이용된다.

감자는 몸에 좋다는 알칼리성 식품이므로 어떤 요리법으로 만들어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완전한 착각이다.

감자는 전분질 식품으로 1%의 지방을 함유하고 있다. 하지만 프렌치 포테이토는 20% 정도, 포테이토칩은 40% 정도의 지방을 함유하게 된다. 감자 삶은 것은 100g당 72kcal를 내는 반면 프렌치 프라이는 324kcal, 포테이토 칩은 528kcal를 낸다.

감자를 튀기거나 칩으로 만들었을 경우 비타민C는 완전 상실되고 더 이상 감자로서의 의미는 없어진다.

미국 상원의 영양문제특별위원회의 한 보고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하고 ‘감자 아닌 감자’의 탄생이라고 말했으며, ‘식품의 문명화’는 ‘인간의 질병화’를 초래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미국인은 칼로리의 2/3를 설탕과 지방에서 취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당질인 설탕과 포화지방으로 취하는 열량 권장수준의 한계를 초과하고 있는 것이며 모든 만성질환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은 서구인의 식생활 변화에 따른 통계를 보면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의 섭취비율이 대략 8:1:1에서 4:4:2로 바뀌었다.

단백질의 섭취는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물성 단백질의 섭취는 감소하고 동물성 단백질의 섭취는 증가하였다. 탄수화물의 섭취는 1/2로 감소했지만 설탕류 등 단순당질의 섭취는 5배로 증가하고 복합당질의 섭취는 1/3로 감소하였다.

섬유질의 섭취도 1/6로 감소되고, 전체적인 에너지원으로서의 탄수화물의 비중이 줄어든 것에 비하면 설탕류의 섭취비중은 무척이나 많이 늘어난 셈이다.

지방의 섭취는 4배로 증가하면서 포화지방의 섭취는 7배로 증가하였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치킨이나 감자는 대부분 라드나 쇼트닝으로 튀겨진다. 어렸을 적, 아니 지금도 일부에서 사용하고 있는 하얗고 뭉글뭉글한 고체기름이 그것이다.

라드는 돼지기름이고 쇼트닝은 어유나 우지 등을 사용하여 반고형화한 고체기름이다. 고체기름은 포화지방이다. 라드와 쇼트닝은 가공과정 중 산화된 지방과 트랜스형 지방, 수소화된 지방 등의 변질된 지방들이 만들어진 아주 질이 나쁜 기름이다.

과다한 포화지방, 변질된 불포화지방은 일단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 물론 콩기름으로 감자를 튀긴다고 해도 지방 함유량과 칼로리가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판되는 대부분의 포테이토칩이나 프렌치 프라이는 쇼트닝이나 팜유로 튀겨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인체 내로 들어가 생화학적 대사에 혼란을 야기한다.

인류의 유전적 골격은 4만 년 전 현생인류의 탄생 이래 크게 변화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옛 조상들의 식생활은 더욱이 인류의 생화학적 대사리듬과 일치한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지금의 식생활의 변화는 큰 문제를 안고 출발하는 것이다. 유전적인 변화가 식생활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환경의 적응능력이 3세대를 지나야 생긴다는 보고도 있지만, 인간은 그 유전적 골격이 쉽게 환경의 변화를 따라가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감자라고 불리는 포테이토칩, 프렌치 프라이는 더 이상 감자를 모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We are what we eat, our brain too are what we eat.”라는 말이 있다. 즉 우리가 먹는 것이 몸이고 머리라는 뜻이다. 우리는 먹는 것을 통해 피를 만들고 살을 만들고 감정을 만들고 삶을 영위한다.

먹는 것의 중요성이 과학적으로 해명되는 시대에 더할 나위 없이 잘못된 영양지식이 유포되고, 식품의 가공기술이 발달하는 현재는 일일이 설득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슴 아픈 현실이 되어버려 항상 마음 한구석에 불편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게 한다.

포테이토칩은 더 이상 감자가 아니다.



 

설탕, 물엿, 소금

 

흰 쌀밥, 흰 밀가루, 흰 설탕의 3백(白)식품 공포는 5백(白)식품, 6백(白)식품, 아니 전 식품으로 확대되어갈 것처럼 보인다.

흰 소금, 흰 조미료까지 흰백식품으로 끌고 들어가 건강을 해치는 타깃으로 삼자 흰색의 화학 조미료는 광고에서조차 그 모습을 감추었다. 대신하여 그 자리를 채운 것이 흰 조미료와 흰 소금이 잔뜩 들어 있는 맛있는 즉석식품, 냉동식품, 레토르트 식품들이다.

이렇게 건강을 바라는 소비자의 식탁은 언제라도 우롱당할 수 있다.

정제염을 문제삼으니 천일염을 볶은 소금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슈퍼마켓에 가면 흰 설탕과 황설탕, 흑설탕이 있고 맛소금과 정제염, 천일염이 있고, 물엿도 하얀 것과 누런 것이 있다. 대체 무엇이 좋은 건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러한 주부들의 혼란은 대체로 ‘그래도 깨끗한 것, 하얀 것이 좋겠지’로 결론이 난다.

설탕은 사탕수수나 사탕무에서 뽑아내는 것으로 원당은 섬유질과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다. 그것을 정제하고 표백한 것이 흰 설탕이다.

하얀 정제염은 78∼85%의 염화나트륨과 각종 미네랄을 함유하고 있는 천일염을 정제하고 표백하여 만든 것이다. 설탕보다 나을 것 같아 선택한 하얀 물엿은 예전에 가래떡 찍어먹던 조청을 표백한 것이다.

자연적인 상태의 모든 것들은 색깔이 곱지도 못하고 지저분하게 보인다. 상태가 고르지도 않다. 청결과 위생을 제일로 생각하는 현대인에게는 상품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과학과 문명의 새로운 전환을 부르짖는 이 시대의 외침은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도 더욱 간절해지지 않나 싶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는 것, 사회와 자연, 인간이 처해 있는 환경 속에서 더불어 살아간다는 생태학적 세계관으로 새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결국 인간을 위한 외침인 것이다.

출처 : 들꽃은 스스로 자란다
글쓴이 : 하으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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