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y

[스크랩] 밥상을 다시 차리자 7

들바람 2007. 1. 4. 02:35
제 5 장 약이 되는 습관, 병이 되는 습관

 
형식 파괴의 시대, 내용 파괴의 시대

전통적 윤리가 젊은이들의 생각과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는 지적은 지금의 젊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무분별한 자유를 허용하게 하였다. 자녀들은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며 그들이 향유하는 세계는 넓어진 듯 보이나, 다양해진 가치들의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 윤리는 형식적인 것들을 강조하고 내용의 문제, 본질적인 의미들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며, 그 윤리의 주체인 인간을 소외시켜왔다. 젊은 세대들은 이런 형식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고 자기를 짓누르기만 하는 형식을 파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신의 방식과 내용이 중요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형식의 파괴가 내용을 살려내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음식과 식습관에도 반영되었다.
음식은 형식을 갖추어 여유있게 먹기보다는 자신의 의미를 찾기 위한 모든 노력들 속에 빨리 먹어치워도 되는 것들이었다. 격식은 모두 불필요한 것이고 빨리 어느 한 가지로 한 끼를 때우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식습관은 이러한 자기 명분을 가지고 고착되어갔다.
이러한 잘못된 식습관의 정착은 갑갑한 사회적 틀 속에 억압되었던 개인의 생각들이 한순간에 무분별하게 폭발하면서 나타나는 뒤틀린 자기 표현방식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그렇게 현대인은 식생활의 희생과 미식의 여행이라는 이중성 속에 살아가고 있다.
수저를 나란히 놓아야 하고, 국과 찌개가 있어야 하고, 물이 있어야 하고, 반찬은 다양하게 꾸며져 있어야 하고…… 이런 것들에 대한 궁극적인 인식은 형식을 거부하는 세대들의 식사가 간편한 빵과 콘플레이크와 우유로 바뀌어가면서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동전에는 양면이 있다. 모든 사물에도 양과 질이 있고 세상에는 밤과 낮이 있는 것처럼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양면성 중 어느 한 면을 고착하고 강화하는 문제는 자신의 지배논리와 우월성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두 가지의 양면은 한 사물의 특성을 규정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조건들이다. 어느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부정하며 그 질과 연속성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형식의 문제가 내용의 문제를 무시하고 우선적으로 평가되어서도 안 되며, 내용의 문제가 형식을 방치해서도 안 된다. 내용이 형식을 갖추는 문제는 정성어린 음식이 보기 좋게 그릇에 담기는 것과 같으며, 형식이 내용을 바꾸거나 채우려고 하는 노력은 빈 수레의 요란함을 깨달은 삶의 성찰의 결과일 것이다.
그릇에 물이 넘치면 그릇을 바꾸어야 하고, 물이 아니거나 이미 썩어버린 물이 담긴 것이라면 그릇은 물을 비워내야 한다. 우리는 지금껏 썩은 물을 비워내는 작업을 해왔다. 올바른 식사는 좋은 그릇에 담아져야 한다. 그래야 궁극적인 아름다움과 그 의미를 모두 담아낼 수 있다. 여기서 말한 그릇의 문제는 예쁜 찬기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형식을 갖추고 습관을 만드는 일이다. 습관은 곧 생활의 문제이다.
올바른 식사습관을 갖는 것은 건강한 음식이라는 내용과 함께 만들어내는 형식을 갖추는 일이다. 격식을 갖추고 습관화하는 일은 올바른 식사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이다.
모든 영양상의 문제는 하루아침에 발생하지 않는다. 영양의 결핍이 생기는 문제나 대사상의 혼란으로 야기되는 질병에 관한 문제는 오랫동안의 잘못된 식생활과 식사습관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다. 그러나 한번 굳어져버린 식습관을 바꾸는 문제는 결코 쉽지 않다.
식생활과 관련된 모든 질환은 하루아침에 운이 없어 발병한 것이 아니다. 잘못된 식생활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식원병은 식생활 습관에 대한 반성과 실천 없이 절대 희망적인 치료방법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몸에 나쁜 것을 외쳐대고 그런 것 한두 번 먹는다고 하루아침에 병이 나지 않듯이, 좋은 식사와 식습관을 가지도록 노력해도 아스피린 한 알의 진통효과처럼 그 효과를 바로 확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식원병에는 온갖 특효약이 유행하지만 식사가 바뀌고 생활이 바뀌어야만 낫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앞으로 다루게 될 식사습관을 비롯한 생활습관에 관한 문제들은 무심코 넘길 수 있는 것들이지만 한 번쯤 새겨볼 만한 충분한 의미가 있다.
매일 삶의 일부가 되어 무심코 하고 있는 일들과 생각들. 집에서 밥 먹는 일을 어떻게 하느냐, 어떠한 생각으로 사느냐, 어떻게 활동하느냐의 방향과 일상의 문제들은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건강을 지키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외식도 할 수 있고, 초대받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지만 내가 차린 식탁만큼은 지켜야 한다. 내가 차린 매일 먹는 식사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 가족의 밥상만은 원칙이 있고 고집있게 차려야 한다. 이건 습관의 문제이고 습관의 문제는 생활의 문제이다. 어떤 생활을 하느냐의 문제는 건강과 질병을 가름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먹을까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하고 무심코 던진 말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 음식의 맛일 것이다. 그만큼 자신의 감각기관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어서인지 우리는 입에서 전해오는 느낌을 참으로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혀끝의 미각신경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둔화되고 길들여져 오로지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만 찾고 있다. 후각과 시각을 좌우하는 신경까지도 향기롭고 달콤한 것, 예쁘고 정갈한 것만 선호하게 되어버려 가장 자연스럽고 거칠고 곱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우리의 태도가 되어버렸다.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할 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영양도 아니고 편리성이나 가격도 아니다. 가장 먼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몸에 맞느냐는 적합성의 여부에 관한 것이다. 맛도, 영양도, 가격도, 편의성도 아닌 신체의 적합성, 이 문제를 우리는 너무도 까맣게 잊고 살아왔다.
TV에서 한국의 문화탐구 중 먹거리 편을 다룬 적이 있었다. 한국인은 곡채식 민족이었으며, 동양인의 장은 서양인에 비해 길어 섬유질이 풍부한 통곡식과 채소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현재 도정되지 않은 쌀을 기름에 볶는 것도 위험하다는 생각에, 쪄서 갖은 채소와 함께 소스로 버무려 먹는 것이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고 있는 건강바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의 비빔밥을 연상케 했는데, 더욱 인상적인 것은 미국 건강재단의 한 박사가 한 말이었다. 왜 한국 사람들은 모든 영양이 모여 있는 씨눈과 껍질은 제거하고 하얗게 도정해서 먹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기름기가 흐를 정도로 윤기나는 햅쌀과 고깃국 한 그릇이 아직도 최고의 밥상으로 여겨지고 부와 여유의 상징으로 각인되는 뿌리 깊은 식생활 풍토 때문일까? 무분별한 서양의 식생활을 쫓아가고 있는 우리의 식생활 변화와 너무나 상반된 현실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현미 60%에 나머지 차조, 차수수, 율무, 기장, 통보리 콩, 팥을 가지고 오월 대보름에 지어낸 현미잡곡밥은 우리한테 가장 소중한 주식이며 영양의 보고이고 건강을 지키는 출발점이다. 인체에 유익한 음식에는 모두 섬유질이 들어 있다. 현미잡곡이 그렇고 채소가 그렇고 과일이 그렇다.
섬유질은 인체 내에서 소화되는 시간을 조절하여 과식하지 않게 포만감을 주고 6미터나 되는 소장을 돌아 나오는데, 소장 전체가 무리 없이 고루 일을 나누어 하게 하며 영양의 흡수가 천천히, 그러면서도 완벽하게 흡수될 수 있도록 조절하고, 대장에서 노폐물과 함께 빠른 배설을 할 수 있도록 장의 운동을 촉진한다.
소화도 안 되며 에너지 효율도 없는 불필요한 영양소라고 모든 음식에서 섬유질을 제거해버린 지난날의 영양학과 식품 가공기술의 발달은, 우리를 잘못된 식생활로 안내하면서 만성질환에 찌들어 사는 인생으로 몰아가고 있다.
육식의 과다섭취, 육가공식품과 가공된 유제품의 범람, 정제되고 표백되고 방부처리된 수입 밀가루로 만들어진 모든 과자와 빵, 콩밥도 싫은 흰 쌀밥, 제철을 모르는 하우스 재배로 비타민을 비롯한 섬유질의 함유량도 저하된 과일들, 그 질깃한 채소의 줄기와 뿌리조차 씹을 수 없게 변해버린 입맛과 약해진 치아…….
우리는 모든 식사에서 섬유질을 잃었고, 그 대신 육체적 허약과 질병, 정신적 나약과 무기력, 사회적 무규범이라는 과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섬유질과 정신적·육체적 약화에 대한 연관성이 너무나 중요한 문제로 대두한 것이다.
정신적·육체적 건강 모두가 올바른 식생활에서 출발한다. 수만 년 전부터 인류가 먹어왔고 조상 대대로 먹어왔던 것들은 우리의 유전자에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어 우리는 쉽게 이를 알아챌 수 있다. 인스턴트식품과 가공식품, 도정되고 정제된 식품을 삼가고 섬유질이 풍부한 통곡식의 현미잡곡밥과 뿌리, 줄기, 잎도 모두 먹을 수 있는 다양한 채소류, 신선한 제철의 과일을 주식과 부식과 후식으로 삼아야 한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하는 이때 이러한 음식들은 예부터 먹어와서 우리의 유전자에 익숙하고, 얼마나 도정되지 않고 정제되지 않고 가공하지 않은 자연적인 것들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먹을까
 
‘생각의 수전노’라는 말이 있다. 생각하기 싫어하고 번거로운 것도 싫어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면 생각 없이 무엇을 가지고 판단하고 행동할까? 충분한 생각과 이성적 판단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말초의 감각만이 판단의 근거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 감각은 대체로 상대나 사물이 전해주는 이미지, 분위기, 격식과 어투 등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형성된 감각을 너무 신뢰하게 되는데, 이것은 자신의 충분한 생각과 체험의 결과로서 형성된 그런 책임있는 감각이 아니라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식품을 선택하고 조리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뚜렷히 나타난다. 무엇을 선택하는 문제에서 인간의 몸에 적합한가를 먼저 염두에 두기보다는 화학조미료로 변질된 혀의 미각신경을 신뢰하고 있고, 그래서 무심코 선택하게 되는 것들은 흰 쌀밥, 흰 밀가루, 흰 설탕, 흰 소금, 흰 조미료였던 것이다. 이런 것들로 만들어진 식품은 맛있고 달고 부드럽고 황홀하기까지 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고슬고슬한 흰 쌀밥과 고깃국이 최고의 밥상이었던 보릿고개 시절은 지나갔다. 먹는 것과 관련한 사회문화적 영향은 지대하고, 현재는 이런 것들을 극복할 만큼 급속한 시대와 환경의 변화를 맞고 있다.
이제는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음식만 보면 달려들던 시대를 지나, 입맛을 찾아헤매던 시절도 보내고, 우리의 몸과 머리로 생각하고 먹는 시대로 달려가야 한다. 머리로, 의지로 실천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식생활을 개선하는 데 있어 처음에는 각오와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지만, 일정 시간 훈련이 되면 이는 생활 그 자체가 되어 무의식의 자연스러움 속에 올바른 식생활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식품의 선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좋은 식품을 어떻게 먹느냐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대형 냉장고를 선호하는 데는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쉽게 변질되는 문제도 있지만, 일단은 대형 할인점을 이용하여 큰 묶음 단위의 제품들을 구입하다보니까 큰 냉장고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대형 냉장고는 주부의 편리를 위해 오랜 시간 여러 식품들을 저장하는 기능을 충분히 해내고 있지만, 그 속에서 시들고 있는 식품의 영양은 어쩌란 말인가. 식품의 영양과 생명력은 유통, 보관, 조리과정 중에서 많은 부분을 잃게 된다.
그렇다면 식품을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는 간단하다. 최대한 유통기간이 짧은 식품, 제철의 신선한 것을 선택하고, 식품의 매장과 집 안의 냉장고에서의 보관과 저장기간을 줄이고, 요리시간을 단축시키는 조리법을 사용하여 최대한 가볍게 조리하여 먹는 것이다.
식품의 영양소는 자꾸 가열하고 복잡한 조리과정을 밟을수록 쉽게 파괴된다. 뿐만 아니라 기름에 열을 가할수록 식품의 산화 위험성이 증가하여 발암물질에 노출될 기회도 증가하게 된다.
짧은 시간에 가볍게 조리하다보면 좀 질깃하긴 하지만 영양도 살리고 음식 고유의 맛과 향도 즐길 수도 있다. 이렇게 자연적인 것들로 입맛이 길들여지면 입맛은 몸에 안 좋은 식품들을 싫어하게 되고 식품의 상업성 광고에 의해 형성된 감각의 잘못을 찾아내게 된다.
자연적인 식사에 의해 회복된 혀의 미각신경이 맛없는 흰 쌀밥, 인스턴트와 가공식품의 첨가물, 화학조미된 음식, 안 좋은 기름으로 튀겨낸 음식을 가려낼 수 있는 체험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얼마나 먹을까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먹고 있고, 입에 맞는 것을 먹다보면 과식하는 날도 없지 않다. 얼마나 먹는 게 좋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식이 장수의 비결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식욕은 위장의 기아수축과 혈당이 떨어지고 체온이 저하되면서 생기는 생리현상이며, 음식에 대한 기억과 감각기관의 자극에 의해 생기는 음식에 대한 욕구이기도 하다. 식욕은 인간의 본능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를 조절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식사량을 줄이기 위해 위절제 수술도 불사하는 세상이고 보면, 인간의 식욕과의 싸움은 끝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항상 먹을 것 앞에 괴로워하는 양심은 실제 나쁜 음식을 먹은 경우보다 더 나쁠 수 있다. 소식을 해야 건강할 수 있다는 불변의 명제는 먹는 것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최소한의 죄책감과 건강에 대한 염려증을 앓게 한다. 하지만 알면서 못 하는 것은 일관되게 개인의 의지에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괴로워하거나 다른 사례를 들어 변명을 할 일도 아니다.
얼마나 먹어야 하느냐의 문제의 답은 먹고 싶은 만큼이다. 먹고 싶은 양을 먹지 못하면 신체는 이를 또 하나의 스트레스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먹고 싶은 생리적인 요구가 변질된 혀와 늘어난 위, 단순당질의 급격한 흡수, 장벽의 손상에 의한 영양소 흡수불량과 같은 신체의 상태에 의해 증가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식은 질병을 가진 사람만이 실천해야 하는 요법도 아니고, 건강을 지키기 위한 예방 의학적 측면의 과제만도 아니다.
소식은 본능을 뛰어넘어 달성해야 할 목표 이전에 올바른 식생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인간의 먹거리를 먹고 싶은 만큼 먹은 결과가 소식이어야 한다. 소식을 천명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쫓아갈 수 있는 행진 선두의 깃발이 아니다. 소식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음식의 부재가 문제인 것이다.
즉 소식할 수 있는 원천을 제거한 것은 잘못된 식생활이었다. 모든 자연식품에서 섬유질이 제거되고 설탕과 지방의 과다섭취가 조장된 것, 자연식품의 가공을 통해 비타민과 미네랄이 제거되고 화학조미료로 맛을 내기 시작한 것, 유통과 보존기간을 늘리기 위해 첨가된 화학물질의 남용…… 여기에 가장 큰 이유가 있다.
칼로리 중심의 영양학과 식품 가공산업의 발달은 섬유질을 소화되지 않는 불필요한 영양소로 규정하고 모든 음식에서 제거하기 시작했고, 씨눈과 껍질의 섬유질을 제거한 흰 쌀밥과 흰 밀가루로, 또 이들의 가공식품으로 우리의 먹거리를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먹거리가 되는 자연계의 식품 중 어느 것 하나 섬유질이 없는 게 없다.
식생활의 변화와 함께 늘어난 대장암, 직장암, 당뇨, 고혈압, 동맥경화 등 만성질환의 기하급수적 증가 앞에 섬유질에 대한 재평가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고, 식생활에 구체적 지침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섬유질이 풍족한 음식들은 절대 씹지 않고 넘길 수가 없다. 현미 잡곡의 와글와글한 느낌은 씹어야 넘어가고 씹어야 그 고유의 고소함을 즐길 수 있다. 야생에서 자란 산채소들은 그 섬유질이 더욱 질겨 하우스에서 성장한 푸른잎 채소들과는 그 질이 다르며, 독특한 향이 풍부하고 고유의 맛도 가지고 있다.
충분히 씹는 습관만이 포만감을 주고 과식을 방지한다. 뇌의 만복중추는 식사 시작 후 20여  분이 지난 후에야 만족하므로 천천히 먹으면 그만큼 과식을 예방하고 소식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이다. 하지만 씹을거리 없는 음식을 천천히 오래 씹어먹기는 무척이나 곤란한 일이다. 설탕이 첨가된 모든 음식이 그렇고, 도정한 곡식이 그렇다. 섬유질이 풍부한 음식은 위장관에서 수분을 흡수하여 팽창하기 때문에 포만감을 준다.
이렇게 섬유질이 풍부한 음식은 내가 소식을 해야겠다는 별도의 의식을 필요없게 한다. 소식은 내가 먹고 싶은 만큼의 결과이고, 이는 극히 자연스런 습관이 되어버린 생활 그 자체이다.
지방의 과다섭취도 과식과 질병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지방의 섭취는 주로 육류와 식용유와 같은 가공된 기름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육식의 섭취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 섭취기회도 많아졌지만, 식품의 질적 구성이 달라짐에 따라 지방의 섭취를 급속하게 늘리는 결과가 되고 있다. 육고기의 지방함량이 증가함에 따라 육식을 탐닉하는 경향은 더욱 증가하는데 이는 지방의 탐닉성에 의한 것이다.
또한 맛도 향도 없는 무색·무미의 식용유를 즐기므로 우리는 지방의 섭취를 조절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냉장고의 참기름과 들기름을 혼돈하게 되면 냄새를 맡아 구분한다. 재래의 기름은 색이 거무튀튀하고 침전이 생기고 향이 있고 고유한 맛이 있다. 아무리 좋은 기름이라도 너무 많이 사용하면 음식이 느끼해서 먹을 수가 없다.
기름은 열을 가하지 않은 형태로 먹거나 가공되지 않은 자연상태에서 먹으면 느끼해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하지만 정제된 가공 식용유는 미각신경을 조절하는 고유의 맛과 향을 내는 성분들이 모두 제거되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섭취량을 조절할 수가 없다. 기름은 열을 가하면 가할수록, 높은 온도에서 튀겨낸 튀김일수록 더욱 맛이 있다.
우리는 예부터 지방의 섭취를 양념의 수준으로 또는 푸른잎 채 소와 콩과 참깨와 들깨, 견과류 형태의 자연식품 그대로 섭취하였다. 자연상태의 지방식품은 아무리 맛있어도 먹을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정제 가공된 식용유를 높은 고온에 튀기거나 열을 가하여 사용하면 기름의 맛이 더욱 증가되고, 한번 튀김음식에 길들여지면 끝없는 탐닉현상을 갖게 된다. 가공된 기름의 섭취는 변질된 화학기름의 성분으로 인체를 위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탐닉성향의 증가로 과식과 비만을 부르게 된다.
자연적인 형태의 식품을 섭취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신체가 겪어내는 감각은 지극히 정상이며, 우리는 이를 믿어주어야 한다. 배고플 때 먹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먹고 싶은 만큼 먹는 것…… 이러한 결론은 현재의 잘못된 식생활에 길들여진 변질된 입맛과 소식과 자연식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또한 인스턴트와 가공식품, 도정하고 정백한 식품에는 섬유질 못지않게 인체에서 중요하고 필요한 모든 미네랄이 제거되어 있다. 이 미네랄은 신체의 대사를 활성화시키는 효소로 작용하는 것도 있고, 자연의 입맛을 찾아주는 것도 있다. 이러한 미네랄이 결핍되면 더욱 가공된 입맛을 찾게 된다. 천연의 미네랄을 제거하고 맛도 영양도 모두 잃게 된 현대의 가공식품에 첨가된 화학첨가물들은 우리의 미각신경을 완전히 마비시켜놓고 특정 음식에 탐닉하게 한다.
인간의 몸에는 호메오스타시스, 즉 생체 항상성이라는 항상 일정한 환경과 조건을 유지하고자 하는 위대한 자동조절 장치가 있다. 짜게 먹은 후에 물을 더 먹게 되는 것과 같은 신호를 보내주는 시스템을 말한다. 가공식품에 첨가되는 화학첨가물들은 이런 장치들을 마비시켜버리는 것이다.
각종 보존제와 발색제, MSG 등에 들어 있는 엄청난 양의 나트륨염과 함께 먹게 되는 인스턴트·가공식품은 정말 그것을 짜게 느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식품 고유의 맛이라고는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가공식품에는 단맛과 부드러운 맛과 MSG와 같은 인공감미료의 맛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인스턴트·가공식품, 도정하고 정백된 식품으로 길들여진 입맛과 생리적 변화를 신뢰하여 먹고 싶은 만큼 먹으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식생활을 가공하지 않은 극히 자연적인 형태로 바꾸고 난 후 내 입이 원하는 대로 소금도, 물도, 밥도 먹어주면 된다. 그리고 더욱 노력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면 처음에는 힘들더라도 약간 모자라고 부족한 듯한 식사에 만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모두가 의식적인 작업이어서 힘들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자연적인 식사와 소식의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하다보면 나중에는 극히 자연스런 생활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위의 용적은 서서히 줄어들고 신체의 리듬은 그 수준에 맞추어 적응된다.
모든 지식을 획일화하여 받아들이는 습성은 자기 편의주의와 자기 경험을 중심으로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고착화된 것들이다. 그렇게 고착화된 지식은 오히려 자신을 억누르는 스트레스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습관의 문제는 생활의 문제이고, 개인의 생활은 모든 사고와 마음과 행동이 통일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밥은 숟가락으로, 반찬은 젓가락으로
 
“밥을 숟가락으로 먹었더니 살이 빠졌어요.”라며 그 이유를 물어오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 또한 밥은 숟가락으로 한 수저씩 떠먹고 반찬은 조금 먹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일반상식을 뒤집는 우연한 통계를 내고 있었다.
나로서도 그 질문자의 결론에 충분히 동의를 했다. 물론 비만의 원인이 수저의 사용, 젓가락과 포크의 사용 유무에 모두 달려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이러한 습관에 관한 문제들은 다양한 사람간의 영양학적 처지에 따라 충분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수저와 젓가락을 사용해 밥먹는 습관의 문제가 건강과 미용에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할 때 이는 아주 의미 있는 것이다.
빠르게 변모하는 사회흐름에 비추어 볼 때 수저와 젓가락의 사용은 불편한 점이 없지 않다. 균형적인 영양소의 섭취를 위해 밥의 양은 줄여도 반찬은 여러 가지를 먹어야 한다는 통념은 젓가락과 포크의 사용범위를 확대시켰다.
우리의 주식은 밥이다. 도정되고 표백된 밀가루가 더 이상 우리의 주식 자리를 밀어낼 수 없고, 또한 서양인들처럼 육식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결론은 이미 내려졌다. 서양인들 사이에서도 고섬유질, 전분질 식사가 만성질환을 예방하기 위한 좋은 식사법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우리의 주식은 밥이며 밥이 중요한 만큼 수저의 사용도 중요하다. 밥은 수저로 떠야 일정량을 담을 수 있다. 젓가락이나 포크로 담을 수 있는 양은 턱없이 작다. 젓가락으로 밥을 먹게 되면 줄지 않는 밥그릇을 볼 수 있고, 때론 밥알을 세느냐는 핀잔을 듣기가 일쑤다.
그러면 왜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그 이유는 밥을 먹는 도구로서의 문제가 아니다. 젓가락의 사용이 늘어난다는 것은 주식으로 대변되는 탄수화물의 섭취가 줄어들고, 고칼로리와 염분의 섭취가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집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젓가락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젓가락은 반찬 위를 계속 날아다녀야 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반찬을 통한 칼로리와 염분을 과다하게 섭취하고 있는 것이다.
균형적인 식사를 통해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젓가락의 놀림을 빨리 하고, 따라서 과잉된 칼로리와 염분섭취에 의한 체중증가의 문제를 내재적으로 키워왔던 것이다. 젓가락의 놀림이 빠른 사람은 그만큼 반찬을 많이 먹을 확률이 높고, 살이 찔 확률도 많다.
식사를 할 때 수저만을 활용해도 문제는 있다. 반찬먹기를 게을리할 소지가 있고, 국물요리를 좋아한 덕에 이 또한 염분과 칼로리 과잉상태에 빠져 살이 찌는 데 한몫 거들 수도 있다. 사실 국물요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반찬도 많이 좋아한다. 국 좋아하고 반찬 많이 먹는 사람치고 날씬한 사람은 많지 않다.
수저로 국물도 많이 먹고 젓가락을 재빨리 휘날리며 반찬도 많이 먹을 경우에는 정말 식사를 빨리 해야 된다. 또 빨리 먹는 사람치고 뚱뚱하지 않은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수저와 젓가락의 사용을 한 가지씩 교대로 하고 천천히 먹는 습관에 익숙해져야 한다. “밥은 얼마 안 먹는데 살이 쪄요.” 하는 사람은 식사중에 무심코 반찬을 향해 젓가락을 날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밥은 수저로, 반찬은 젓가락으로! 여기에는 수저 한 번, 젓가락 한 번의 공존의 미학, 균형의 철학이 들어 있다. 밥 한 숟가락 먹고 충분히 씹는 동안 젓가락은 천천히 반찬을 가지러 간다. 이렇게 격식을 갖추어 식사하는 습관은 조상 대대로 소중한 지혜로서 담겨 내려온 것들이다.
밥을 한 수저 뜨고 수저를 내려놓고 젓가락을 집어 반찬을 집으러 가는 그 시간적 여유는 씹는 능력과 소화기능을 충분히 보장해 주고, 과식을 막으며, 염분과 칼로리의 섭취를 제한해준다.
반찬을 다양하게 먹어야 영양소를 고루 보충할 수 있다고 선전한 기존의 영양학은 젓가락의 사용을 부추기고, 결론적으로 주식의 부족과 염분과 칼로리 과다섭취 등의 문제를 확산시킨 측면이 있다. 영양소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식품을 섭취하는 습관이 중요한 것이고, 얼마나 신체의 섭리에 순응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반찬과 국물을 좋아하면 살이 찐다는 일반적인 통계는 수저와 젓가락의 적절한 사용, 격식을 갖춘 건강한 식사습관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식사를 두 번 하는 습관, 세 번 하는 습관

식사를 하루에 한 번만 하는 유병팔 교수님도, 아침식사를 하지 않는 김동길 교수님도, 하루 2식을 권하는 자연요법자들도 모두 자신의 건강비결이라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일반인들은 많은 혼란을 겪는다. 하루에 몇 번의 식사를 해야 건강에 좋은가? 또 아침은 꼭 먹어야 하는가? 아침을 안 먹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던데! 다양한 사례와 건강에 관련한 정보들에 우리는 충분히 혼란스럽다.
하루 3식의 식사는 조직적인 집단생활이 확대되고 음식을 제공하는 사람의 편리를 위해 짜여진 룰이라는 측면도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규칙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경우도 있고 또 다양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변칙이나 원칙의 구체적 응용도 있다.
집단생활을 해야 하고 조직구성원을 이해해야 하는 측면에서 보면 식사습관은 합의점의 도출이 필요하다. 여기서 합의란 건강상의 문제에 있어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체는 낮 동안에는 물질의 대사와 배설이 촉진되고 밤에는 흡수와 합성이 촉진된다. 즉 낮에는 에너지를 만들어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내일 사용할 생리물질들을 만들어 비축하려 하는 게 정상적인 신체의 리듬이다.
아침식사를 거르기를 주장하는 사람은 아침에는 배설이 주로 일어나는 시기이기 때문에 배설기능을 돕기 위해 먹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아침을 거르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대사를 위해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렇게 대사와 배설은 상반되는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사람에 따라서는 신체의 대사기능에 더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으며, 배설장애가 더 심각한 경우도 있다. 일반인들이라면 배설도 적당히 잘 되고 대사기능도 원활히 할 수 있는 식사가 필요할 것이다.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절식과 소식, 하루 1∼2식의 식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당뇨병과 저혈당증, 갑상선 질환 환자들과 같이 하루 세 끼 이상의 식사를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당분과 에너지 대사상에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은 끼니를 거르거나 굶으면 죽을 정도로 그 증상이 심각하고 병세 또한 고질화되어 있다.
하루에 3식 이상의 식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잘못된 식생활과 스트레스, 불규칙한 생활습관에 의해 신체의 기능과 리듬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식사의 횟수는 실제 하루 에너지 섭취량과도 관련한다. 식사의 횟수를 줄이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 섭취량을 줄이는 것이다. 현대인은 환경오염과 정신적 스트레스, 무슨 말을 하고 있으며 어떤 생각과 행동을 주로 하느냐에 따라 영양의 요구량과 에너지의 필요량이 다르다.
하지만 이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장치는 없다. 막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고칼로리를 섭취해야 한다. 이들은 하루 3식과 간식을 한다. 비타민과 미네랄 같은 대사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하고 있는 사람들은 고단백, 고지방, 고탄수화물의 식사를 하는 사람들보다 에너지 효율의 측면에서 더 유리하다.
정신적으로 편안한 사람들은 영양의 수요가 낮으며 에너지의 필요량도 적다. 깊은 산속 공기 좋은 곳에서 먹는 술은 취하지도 않는다. 영양과 에너지의 요구량은 일의 강도, 식사습관, 정신적·심리적 상황, 환경적 요인 등에 의해 다양해진다.
칼로리가 부족한 시기에 제시되었던 기존 영양학의 하루 섭취 칼로리의 양은 칼로리 과잉시대, 정신적·환경적 요인이 다변화된 시대에서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하루 칼로리 섭취량과 식사횟수는 개인의 환경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얼마나 자연적인 식사를 유지하고 있는가, 얼마나 좋은 환경 속에 생활하는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는가, 얼마나 에너지를 소모하는 정신적·육체적 노동을 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경험을 일반화하고 실험실의 통계만을 적용하여 칼로리 섭취량을 일괄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식사지침을 고수하고 절식하고 소식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신체의 밸런스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죽을 때까지 3식을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하루 두 끼나 한 끼로도 만족할 수 있도록 신체는 적응되어간다.

 
고기만 먹는 습관
 
고기반찬만 좋아하는 아이들은 영락없이 변비증세를 보인다. 아이들의 경우 장의 탄력과 관련한 장의 운동성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채소와 해조류, 통곡의 섬유질을 먹지 않기 때문에 변비가 잘 발생한다.
섬유질이 결핍된 음식은 장에서 노폐물의 배설을 더디게 하고, 고단백 식사가 만들어내는 암모니아와 같은 질소화합물의 배출을 지연시켜, 재흡수와 해독과정을 치르게 하여 간장을 더욱 피로하게 한다.
현재의 모든 육류는 풀을 뜯어먹고 자랄 수 있도록 방목한 동물이나 야생동물들보다 포화지방 함유량이 수배로 증가되어 있다. 예전의 고기는 질기디질긴 단백질을 보충하는 식품이었고, 병후 회복을 돕기 위해 필요한 식품들이었다. 그에 비해 요즘의 육고기는 포화지방이 증가하여 부드럽고 고소한 맛을 즐기는 지방식품이 되어버렸다.
지방의 과다섭취는 단순히 지방이나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게 하여 만성질환을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세포의 구조를 바꾸어놓고 세포의 기능을 교란시키고 있다. 세포는 인체의 기본단위로 세포단위의 문제는 조직과 기관 전체의 문제를 유발한다. 이는 곧 면역저하를 통한 원인 모를 만성질환의 주범이 되는 것이다.
또한 고지방 식사는 담즙의 분비를 증가시키고, 담즙산의 과도한 분비는 장내 세균에 의해 3-메틸콜란트렌이라는 발암물질의 생성을 촉진한다.
육식의 과다섭취는 췌장의 트립신, 키모트립신과 같은 단백질 분해효소를 낭비한다. 효소의 낭비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죽어가는 세포, 각 기관에서 분비되어 제 할일을 마치고 난 호르몬, 외부에서 침입한 세균과 바이러스들, 항원과 항체들을 처리하는 일을 단백질 분해효소가 하기 때문이다.
육식의 과다섭취는 이러한 작용을 하는 효소의 낭비를 부추기고, 결국에는 세포의 교체와 재생, 외부에서 침입한 이물질, 세균과 바이러스를 처리하는 일 등 신체의 불필요한 단백질을 처리할 수 있는 기능을 저하시킨다. 즉 육류를 과식함으로써 세포의 교체와 청소기능이 방해받고, 면역기능은 저하되어 결국 암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육식을 덜하는 것은 효소를 아끼는 일이고, 췌장을 살리는 길이고, 면역기능을 살리는 길이고, 노화를 막는 길이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육류와 같은 고단백 식사가 칼슘을 결핍시킨다는 데 있다. 육류의 단백질에는 유황과 인과 같은 미네랄이 많이 들어 있다. 이는 체액을 산성화시키는 주범들이다.
이러한 산성물질이 혈액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므로 신체는 이러한 산성 미네랄을 혈액 중의 칼슘, 마그네슘과 같은 미네랄과 결합시켜 체외로 빨리 배출시킨다.
이렇게 인체에 유해한 독성물질을 체외로 배출시키는 과정에서 중요한 미네랄도 잃게 되는 것이다. 미네랄이 결핍되어 이러한 산성물질을 제거하지 못하면 신체의 모든 기능은 떨어지고, 신체의 내장기관은 손상을 입게 된다.
많은 양의 칼슘이 들어 있는 식품이라도 인과 같은 산성의 미네랄 성분이 많이 들어 있는 식품이라면 그 가치가 무색해진다. 대표적인 것이 우유이다. 쇠고기 100g당 칼슘과 인의 비율은 4:190이고 우유는 100:90이다.
쇠고기는 칼슘에 비해 인의 함량이 50배 정도 많은 식품이기 때문에 더욱 문제지만, 칼슘 함유량만을 보고 우유를 대표적인 칼슘식품이라고 보는 것 또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현재 공급되는 우유는 고온살균과 맛을 내고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균질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유지방과 단백질의 변성이 증가한다. 또한 우유는 칼슘과 인의 비율이 100:90으로 칼슘의 함량도 많지만 인의 함량도 많은 식품이다. 인은 곧 칼슘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고, 가공과정중 단백질과 지방의 변성은 칼슘의 흡수율을 더욱 저하시킨다.
전인상태, 엄밀히 따지면 섬유질이 음식물이 장벽에서 흡수되기 전인데 장의 벽이라는 체외의 상황에서 노폐물을 재빨리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칼슘과 같은 미네랄은 혈액 내의 산성 노폐물을 제거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우리는 영양의 부족이 문제인 시대를 넘어 영양의 소화와 흡수, 대사와 배설의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소화와 흡수속도가 적절하게 조절되는 식품을 섭취하는 일, 되도록 노폐물을 적게 만드는 식품을 섭취하는 일, 노폐물의 배설을 빨리 촉진시킬 수 있는 식품을 섭취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다.
현대의 아이들에게서 칼슘이 그토록 결핍되고, 20대의 골다공증이 40대보다 늘어나는 일은 모두 잘못된 식생활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식생활을 바꾸지 않으면서 칼슘만 섭취하는 일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 독의 바닥에 구멍이 나 있으면 이를 막고 물을 채우는 것이 지혜로운 이치이다.
증세가 위중하다면 식생활을 바꾸고 칼슘섭취를 보충제로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생활을 올바르게 바꾸어나감에 따라 정화된 혈액의 효과를 체험할 수 있다.
고기만 먹는 황제 다이어트도 유행했고, 외식의 횟수가 늘고 있는 현대인의 라이프 스타일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육식의 기회를 늘리고 있다. 이는 인체가 처리할 수 있는 능력 밖의 노폐물의 과다 생성과 칼슘의 소모라는 영양대사의 측면에서 보면 아주 위험한 일이다.
육식의 과다섭취는 혈액을 산성화시키고, 우리 몸의 젓줄인 혈액의 오염은 모든 기능의 저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기를 먹으면 밥을 먹을 때와 똑같이, 아니 더욱 힘이 나는 것을 느낀다. 모든 힘은 혈당이라는 당분에 의해 생기는데, 이는 육류에 직접적으로 혈당을 올리는 당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췌장의 알파세포에서 분비되는 글루카곤이라는 호르몬이 신체의 저장당분과 단백질을 분해하여 혈당상승을 촉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체에 저축되어 있는 저장당분이 당으로 전환되어 에너지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췌장의 기능이다.
현대인의 병 중에서 가장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췌장질환들, 한의학 오장육부에서도 명쾌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는 췌장질환의 증가는 모두 잘못된 식생활에 그 원인이 있다. 췌장의 랑게르한스섬에 존재하는 알파세포에서 분비되는 글루카곤의 기능은 신체의 비상시에 대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인체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도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을 때 신체의 저장당분과 단백질을 분해하여 사용하게 하는 비상시의 기능이다. 이런 비상기능을 육식의 과다섭취로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밥을 먹어야 고기를 아낀다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갈비집에서는 고기를 충분히 먹은 다음 밥이나 냉면을 먹을 것을 권한다. 여기에는 밥과 고기를 함께 먹으면 고기 고유의 맛을 즐길 수 없다는 미사여구 아래, 고기로 배를 채워 더 많은 매출을 기대하는 지독한 상술이 함께 했으리라 여겨진다.
밥은 탄수화물로 장에서 소화되어 혈액의 혈당을 올리는 당질식품이고, 현재에는 그렇지만도 않다고 하지만 고기는 단적으로 단백질을 대표하는 식품이다. 밥을 먹어야 고기를 아낀다는 이야기는 탄수화물을 먹어야 단백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혈액 중의 혈당은 언제든지 에너지화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다. 물론 단백질도 에너지원으로도 사용되기도 하지만, 단백질은 탄수화물에 비해 비효율적인 에너지원이고, 그 고유의 작용이 더 중요하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흡수되고 신체 내부로 들어온 후 다시 재합성된 단백질은 머리카락을 만들고, 손톱을 만들고, 혈관을 만들고, 내장근육과 뼈를 만들고, 세포막을 만들고, 호르몬과 항체를 만들고, 신경전달 물질을 만든다.
식사량이 부족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근육이 소모되어 수척해진다. 신체는 굶거나 에너지 요구량이 급증할 때 단백질을 당분으로 바꾸어 에너지원으로 이용한다.
밥을 한동안 제때에 먹지 못하면 손톱이 물러지고 머리카락이 푸시시해지고 빠지며, 혈관이 작은 충격에도 터져 멍이 들고, 감기를 달고 살게 된다. 당분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못하여 단백질이 고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결과이다.
우리는 체력이 많이 떨어지고 수척해지면 먼저 육식을 하려고 한다.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쓸 수 있다는 말은 통증이 있을 때 진통제 한 알을 먹는 것과 같다. 왜 통증이 생겼는지를 생각해야 하듯이 왜 단백질 결핍 경향을 갖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밥을 제때 먹는 것, 적절한 복합 탄수화물의 섭취로 안정적으로 혈당을 유지하는 것에는 충분한 단백질을 복용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단백질은 얼마든지 ‘아미노산풀’이라는 창고 속을 순환하며 재사용된다. 축난 몸을 보양하려고 비싼 고기를 듬뿍 먹을 게 아니라, 규칙적으로 충분한 복합 탄수화물을 섭취하고 적절한 단백질을 보충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깃집에서 아무리 고기를 먼저 먹으라고 권해도 밥과 된장찌개와 함께 고기를 먹는 것이 어떨까.
 
 

물 마시는 습관

뚱뚱한 사람치고 물 싫어하는 사람 없고, 마른 사람치고 물 좋아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리하여 비만의 원인이 물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에 물의 섭취를 무조건 줄이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신체의 물을 빼고자 하는 노력은 사우나탕에서 가혹하리만큼 치러진다. 흠뻑 땀을 빼고도 살찐다는 이유로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돌아오는 길목은 현기증에 세상이 비틀거린다.
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냥 물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국물요리를 중심으로 수분섭취를 많이 하고 짜게 먹기 때문에 따라서 물의 섭취도 늘어난다. 뚱뚱한 만큼 혈액순환에 장애를 받기 때문에 혈액량을 늘리기 위한 자구책인 측면도 있다. 사우나에서 땀을 빼는 것보다 국그릇, 찌개그릇을 치우고 좀 덜 짜게 먹는 것이 체중관리에 훨씬 유리하다.
우리 몸의 체액은 0.9%의 생리식염수로 되어 있다. 염분의 섭취가 늘어날수록 신체는 그 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만큼의 물을 잡고 있게 된다. 몸이 무거운 사람, 수분대사가 제대로 되지 않고 부종이 있는 사람은 당장 소금의 섭취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물 마시는 것을 싫어하고 마른 사람들에게는 수분부족 증상이 있는 경우도 많다. 아니, 현대인은 약간의 탈수증상을 가지고 있다. 에너지 생산이 물의 섭취량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왜소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힘을 못 쓰는 경우도 많고, 소변을 별로 보지 않는다거나 변비로 고생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
물을 안 마시는 경우에 자연적으로 땀 분비가 적어지고 대소변의 배설량이 줄어들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신체의 70%가 수분이라고 했을 때, 이 수분 보유량을 지키기 위한 생존의 전략으로 배출기능이 지연되는 것이다.
물을 많이 먹어도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소변도 대변도 시원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이는 대사와 배설기능에 중대한 문제가 생긴 경우이다. 물은 대사와 배설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신체 내에 일어나는 모든 생화학 반응은 물과 산소와 영양소라는 유기물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물은 유기물의 대사에 촉매로서 작용하고 화학반응의 결과로도 생긴다. 또한 물은 대변과 소변과 피부와 호흡을 통해 노폐물을 배설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신체는 두 개의 신장과 넓고 굵은 대장과 두 개의 폐와 피부의 땀샘이라는 배설기관을 가지고 있다. 신체는 소변으로 하루 1,500  ㎖, 대변으로 100㎖, 피부 분비물로 600㎖, 폐호흡으로 400㎖의 물과 함께 노폐물을 배설하고 있다.
노폐물의 배설은 아주 중요한 일로서, 어느 한 부위라도 배설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처음에는 다른 기관의 기능이 강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경과하면 다른 기관도 능력에 한계를 보이고 배설기능이 악화된다.
물은 노폐물의 배설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데, 신진대사를 활성화하여 각 배설기관의 배설이 적절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피부의 배설은 운동을 통한 땀의 분비로 가능하고, 폐로의 배설은 깊은 복식호흡을 통해 가능하다. 소변으로의 배설은 신장을 손상시키는 화학물질의 섭취를 삼가고 수분조절을 할 수 있는 필수영양이 결핍되지 않게 하여 적절하게 기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며, 대변으로의 원활한 배설은 물과 섬유질의 섭취가 충분해야 가능하다.
신체가 음식물의 화학반응을 통해 만들어내는 물의 양과 음식물을 통해 들어오는 수분의 양을 감안하더라도 물은 하루 1,500㎖ 이상 섭취해야 한다. 물을 충분하게 섭취하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노폐물의 배설에 문제를 안고 사는 것이다.
물을 먹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끼는 사람이나 조금만 먹어도 부어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은 배설기능이 정상인지 체크해야 한다. 피부의 땀샘은 잘 작동하고 있는지, 폐의 호흡은 길고 깊숙해 날숨을 통해 노폐물의 배설이 원활한지, 신장이 안전하게 최상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영양상태는 충분한지, 대변의 배설이 원활하도록 섬유질의 섭취는 충분한지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한다.
평상시보다 좀 짜게 먹고 나면 물을 더 찾는 것과 같이 신체는 일정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한 항법장치를 가지고 있다. 인체는 이러한 자동조절 장치에 의해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난다. 이 기능이 쇠퇴하여 체액의 ph와 점도가 기울어지게 되면 그 시점이 질병의 발병점이 되는 것이다.
목이 마르면 물을 먹어야 한다. 또한 충분한 물을 섭취해야 신체의 배설기능이 정상화된다. 이는 칼로리 부족과 함께 노폐물의 배설을 크게 염두에 둘 필요가 없었던 못 먹던 시대에는 질병의 위험도 적었고 크게 문제되지도 않았던 현상이었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칼로리 과잉과 환경오염 물질에 의한 세포의 손상과 교체에 따른 노폐물의 생성이 증가되는 시대에서는 원활한 배설기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에 대한 논란은 많다. 육각수, 증류수, 정제수, 광천수, 생수, 산성수, 알칼리수, 끓여 식힌 물 등등…… 모두 다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또 명쾌하게 의문을 풀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도 않다.
물은 우리가 매일 먹고 있고 많은 양을 마시고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문젯거리이다. 물에 대한 이런 논란을 잠재워버릴 정도의 수질오염 방지대책이 정부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화가 나는 일이다. 팔당과 같은 급수원에 축사와 음식점과 러브호텔을 허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물은 신체에 크게 위해가 가지 않는다면 노폐물의 배설을 위해 어떤 물이라도 일정량 이상을 먹는 습관이 중요하다. 수돗물의 소독 결과 남아 있는 잔류염소가 가장 큰 문제라고 했을 때, 이는 24시간 방치하거나 끓여서 식히면 제거할 수 있다.
끓인 물은 수인성 전염병이 돌 때, 시판 생수는 외부에서 물을 사먹어야 할 때, 산성수는 피부를 세안할 때 사용한다. 물을 끓이면 용존 산소량이 줄어든다. 산소의 결핍이 문제가 된 사람은 물 속의 산소도 중요하다. 그래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유명한 광천수가 나는 약수터를 찾아다닌다.
또한 현대인의 식생활은 육류와 설탕의 과잉섭취로 신체 내에 산성물질을 다량 만들어내고 이를 해독하기 위해 많은 양의 미네랄을 필요로 한다. 물 속에 미네랄이 있다면 음식물로 섭취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정수기로 거르지 않고 끓이지 않은 지하 광천수는 미네랄도 풍부하고 용존산소도 풍부하고 또 그 물의 구조가 많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육각수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현대에 살면서 이런 완벽한 물을 구하기 어렵고, 구할 수 있더라도 가격이 비싸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 어렵다.
어떤 물을 먹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건강과 삶의 질을 염려하는 사람들과 함께 앞으로 더 활발해지겠지만, 정부는 수질에 대한 조사와 연구결과를 발표한 후 쏟아질 국민의 질책이 두려워 이런 부분의 논의를 차단하고 있다.
물에 대한 논란도 시대와 환경의 변화가 낳은 딜레마이다. 어느 것을 택하든 소비자들의 몫이지만, 그 진리는 결국 하나로 통할 것이다.

 
야간에 먹는 습관



야간에 무언가를 꼭 먹으려 하는 사람이 있다. 하루 세 끼 식사에 대한 강박관념과 바쁜 일과 속에 건너뛰어버린 한 끼의 식사를 찾아먹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고, 하루가 바빠 늦은 저녁시간에나 식사를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또는 저녁식사를 일찍 하고 야간에 늦게 잠들다보면, 그냥 자기에는 입이 서운해서 뭔가를 먹다보니 그것이 습관으로 몸에 배어버린 경우도 있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식욕이 항진되어 있거나 공복감과 허전함이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먹는 경우도 있다.
습관처럼 또는 생활이 되어 늦은 시간에 식사를 하는 것은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 신체에 아주 불리한 행동이다. 인체는 낮에는 분해하고 대사기능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자율신경의 교감신경이 활발히 작동하며, 밤에는 내일을 위해 신체에 필요한 물질들을 흡수하고 합성하기 위해 자율신경의 부교감신경이 활발히 움직인다. 야간에 먹는 것은 대부분 흡수되어 분해되거나 잘 배설되지 않고 저축되며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데 쓰여진다.
즉 밤에 먹는 음식은 살을 찌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고, 자율적인 생체시계를 거스르는 일이기도 하다. 신체는 낮에 먹고 일하고 밤에는 쉬고 자는 시계로 입력되어 있다.
이와는 상반된 생활을 지속하다보면 신체는 자율적인 기능을 잃게 되고 에너지 효율, 일의 효율이 떨어지게 된다. 낮에 조금 먹어도 에너지를 잘 만드는 효율적인 시스템이 되지 못해 비만해지거나 밤에 잠 안 자고 공부해도 성적이 안 오른다. 생체시계라 할 수 있는 자율신경의 자율적인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 인간은 비로소 건강할 수 있다.
또한 낮에는 거의 먹지 않다가 밤만 되면 폭식하는 경우도 있다. 스트레스가 자율신경계를 교란시켜 낮에는 교감신경이 극도로 긴장하여 식욕을 잃게 하고, 밤에는 부교감신경이 흥분하여 식욕을 항진시키는 양극단의 생활을 지속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야간에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율신경 기능의 회복이 먼저 문제가 된다. 스트레스의 원천에서 멀어지거나 스트레스를 해소할 만한 방법을 가지고 있거나 스트레스를 뛰어넘을 수 있는 정신력과 체력이 필요하다.
저혈당증과 당뇨병 같은 경우는 환자가 지속적으로 당분을 이용하지 못하여 세포는 항상 굶주림의 상태로 허기져 있다. 이런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자율신경계도 함께 손상되어 있으므로 야간에 식욕을 조절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이런 경우에는 당분의 대사를 정상화하는 올바른 식생활 지침을 따르는 생활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야간에 먹는 버릇이 단순한 습관이라면 되도록 지양해야 하고, 스트레스에 의한 경우라면 먼저 스트레스를 조절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고, 당분의 대사와 관련한 질환으로 만성적인 배고픔의 상태라면 식생활을 개선하여 야간에 먹는 습관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어떤 경우에나 식생활을 섬유질이 풍부한 자연적인 식사로 바꾸면 허기짐이 없어지고, 습관적으로 음식을 찾지도 않게 되며, 스트레스에 대해서도 강해지고, 당분의 대사도 정상적이고 생리적인 수준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
야간에 먹는 것은 병적인 상황에서만 국한적으로 허용되는 좋지 않은 습관이다. 야간 식욕을 잠재우는 일은 건강을 찾는 길임은 물론 자기 성취감을 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밥 먹으며 넋놓는 습관
 
밥 먹으며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입놀림이 느려진다. 우리 집 아이는 밥을 씹지 않고 물고 있다고 걱정하는 부모도 있다. TV를 보며 밥 먹는 아이들은 밥 떠먹는 일은 소홀히 하고 넋놓아 TV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아이들이 씹을거리가 있는 음식으로 씹는 훈련이 되지 못한 것도 문제이지만, 아이들한테 멀티기능을 허락하는 부모의 책임도 크다고 할 수 있다. 밥을 먹으며 TV를 보고, 밥을 먹으며 만화책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공부하고, 헬스 자전거를 타며 잡지를 보고…….
이 모든 다양한 작업을 한꺼번에 수행할 수 없는 것도 지금은 콤플렉스가 되어버린 세상이지만, 그 모든 것의 진정한 의미가 반감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위장을 움직이겠다는 것인데 머리 쓰는 일을 해버리면 혈액은 뇌로 몰리고 소화기능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밥을 먹는 동안 밥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밥이 입안으로 들어가 생명을 다스리는 생명물질이 되고, 그 생명물질들이 혈액의 흐름을 이루며 전신을 타고 흐른다는 암시와 느낌과 감사의 마음은 음식을 그냥 씹어 넘겨버렸을 경우와는 확연히 다른 신체상태를 만든다.
운동은 내 몸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시간이라는 표현처럼, 들리지 않는 내 몸의 소리를 느끼는 작업이 언제 어디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면 몸도 감사하여 더욱 주인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에 집중하여 몸만이 아닌 내 정신까지 함께 참여하는 작업은 일의 효율을 높일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일이 되기도 한다. 부부와 자녀와 식탁 사이에 TV와 신문이 있다면 이 모두를 치우고, 서로에게 오늘의 할 일을 묻고 하루의 느낌을 물어야 한다.
현대인들은 바쁜 일과 속에 어디에도 내가 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어떤 일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든 거기에 나를 묶어둘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느낌을 갖는 건 감상에 지나친 사치가 아니라 일상을 통해 부단히 이루어져야 하는 삶의 덕목이다. 밥상 앞에서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느낌은 있다.

말아 먹는 습관
 
국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밥을 먹어도 국이나 찌개가 있어야 하고, 빵을 먹어도 우유나 주스 없이는 목이 메어 넘어가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한의학에서는 물은 음이라고 보고 음체질인 사람은 물을 많이 먹지 않기를 권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뚱뚱하고 체격이 좋고 습해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물도 좋아하고 국물도 좋아한다. 물의 궁극적인 의미는 대사와 배설에 관계하는 고유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도록 원활히 순환하는 것에 있다. 음체질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경우 물을 피하는 것이 살을 찌지 않게 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수분의 대사, 혈액의 순환이 얼마나 원활하게 일어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제대로 순환하지 않는다면 신체의 어느 부위에서는 수분의 결핍상태가 일어나고, 이는 무한정 갈증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수분의 정체는 더 이상 그 사람의 체질로 인해 해결할 수 없는 과제가 아니다.
당뇨환자가 먹지 않으면 배고파 죽듯이, 체격이 좋은 음체질의 환자가 물을 찾는 것은 그만큼 신체의 어느 곳에서 수분이 결핍되었거나 순환이 안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당장은 물을 먹어야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수분의 순환을 장애하는 원인을 찾아 제거해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물과 국물과 찌개를 좋아한다면 신체의 어느 기관의 세포가 끝없이 갈증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다. 갈증은 짜게 먹어 나타나는 생리현상이기도 하지만 혈액의 순환에 장애가 있고, 신체의 기능이 저하되거나 질병의 상태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물과 국과 찌개를 좋아하는 것은 체질 때문만은 아니다. 대체로 빨리 먹기 위한 방편으로, 씹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또는 짜게 먹어 생리적으로 물 먹는 것에 익숙해져 발생하는 습관이기도 하다. 여기에 화학조미료로 맛을 낸 국물요리가 있고, 그 맛에 길들여진 입맛이라면 더욱 화학조미된 국물만을 찾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밥에 물을 말아 먹는 것이나 국이나 찌개를 좋아하는 습관은 음식물을 씹지 않고 넘기게 되므로 과식을 유발하고 과잉의 염분을 섭취할 우려가 크다. 특별히 질병상태가 아니라면 이런 습관은 좋지 않다.
위산이 적게 나오는 사람의 경우에는 위산을 희석하여 더욱 소화불량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체험적으로 터득하여 알아서 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두 번의 경험만으로도 물을 많이 먹으며 식사했을 때 소화가 안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와 반대로 생각해서 위산이 많은 경우에는 물을 많이 먹는 것이 유리하기도 하고, 실제로 물을 많이 먹는 경우에는 위궤양의 위험도 덜 수 있다. 신체의 모든 기관들은 끝까지 알아서 최선을 다한다. 잘한다고 방치하지 말고 신체가 정말 기분이 좋아서 잘하고 있는지, 악다구니치며 가까스로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어느 정도의 물을 먹고 있으며 어느 정도 국물요리를 좋아하는지를 살펴, 단순한 습관인지 아니면 병적인 상황인지 점검해야 한다.

 
찍어 먹는 습관
 
간장을 찍고, 소금을 찍고, 된장을 찍고, 고추장을 찍고, 각종 소스를 찍고…… 우리는 무심코 찍어 먹는 것에 익숙하다. 말 그대로 이 또한 습관이다. 식사 도중 찍어 먹는 한 단계를 줄이는 노력도 우리는 아주 힘들어한다. 그렇게 습관은 무섭다. 찍어 먹어 가장 불리한 문제 또한 염분의 과잉섭취일 것이다.
미국은 1일 소금 섭취량을 5g 이하로 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이 정도의 양이라면 아무런 간도 하지 않고 식품 그 자체만을 섭취했을 때의 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소금의 과잉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가. 라면 한 봉지에 5g 이상의 소금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갖은 양념과 장류, 가공식품의 첨가물로 엄청난 양의 소금을 섭취하고 있는 우리 몸은 말 그대로 소금절임이다.
우리의 하루 소금섭취량에 대한 통계는 나온 게 없지만 30g 이상을 육박하리라고 예측한다. 그런데도 서구 사람들보다 소금의 피해를 더 크게 보지 않는 것은 천일염을 사용하고 채소와 해조류를 많이 먹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통해 미네랄의 일정 밸런스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식품 가공산업의 발달과 서구식 식생활로의 변화로 우리 역시 안전지대에 머물러 있지 않다. 적극적으로 소금섭취를 줄여나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찍어 먹는 한 단계를 줄이고, 찍는 시간을 아껴 한 번이라도 더 씹고, 채소로 향한 젓가락질을 두 배로 늘려야 한다.

 
빨리 먹는 습관
 
뚱뚱한 사람들은 대체로 급하게 빨리 먹는다. 그리고 날씬한 사람들은 좀 과장하여 식탁 앞에서 하루 종일 먹는다. 이는 식습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씹는다는 것은 음식물을 잘게 자르고 입 속에 분비되는 침샘효소로 음식물의 일부분을 소화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면 제대로 씹지 않고 삼키는 음식은 더욱 부피가 커서 배가 불러지거나 입에서 소화되지 않고 장에 가서 소화되면 더 천천히 소화 흡수되어 살이 안 찌게 되는 것은 아닌가? 혹시라도 이렇게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급하게 씹지 않고 삼키게 되면 뇌의 만복중추는 만족할 줄 모르고 포만감을 느끼지 못해 계속 먹게 된다. 숟가락을 놓고 한참이 지나서야 터질 것 같은 포만감에 숨조차 쉬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만복중추를 만족시키는 콜레시스토카인이라는 물질은 식사를 시작한 지 20여 분이 지난 시점부터 분비되기 시작하므로 그 전에 식사를 끝내버리면 우리 몸은 실제 필요량보다 더 많은 양의 칼로리가 입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도 감지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빨리 먹고 씹지 않고 먹으면 살이 찔 수밖에 없다.
또한 콜레시스토카인은 페닐알라닌이라는 아미노산에 의해 분비가 촉진되는데 페닐알라닌을 원료로 쓰고 있는 갑상선 호르몬, 스트레스 호르몬, 엔도르핀 등의 과다생성으로 페닐알라닌이라는 아미노산의 결핍이 생기면 더욱 식욕이 조절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원인치료가 필요하다.
씹지 않고 빨리 먹는 습관은 소화기에 부담을 주고, 포만감을 주지 못해 과식을 유발하여 비만의 원인이 된다. 많이 씹고 천천히 먹는 것은 입안의 침샘을 발달시키고, 하악골을 발달시켜 인상을 야무지게 하고, 뇌를 충분히 마사지해주고, 피곤에 지친 위장의 부담을 덜어준다. 오래 씹고 천천히 먹어야만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또한 씹는 문제는 씹을거리가 있는 음식의 섭취와도 관련이 있다. 아무리 씹으려 해도 씹을거리가 없는 음식을 계속 죽이 되도록 씹을 수는 없는 일이다. 씹을거리가 있는 껍질이 있고 딱딱하고 질긴 음식들로 식사를 준비하다보면 안 씹고 삼키기는 곤란해진다. 씹을거리가 있는 음식을 마련하고, 더 씹고 천천히 먹으려는 의식적인 노력도 모두 필요하다.

 
고개를 숙이고 먹는 습관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는 밥상머리에 당겨 앉아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먹어야 복스럽게 먹는다고 입이 마르게 칭찬했고, 반듯한 자세로 천천히 먹기라도 하면 밥알 세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은연중 들어온 이러한 말들에 자연스럽게 길들여져 있다.
음식을 게눈 감추듯 빨리 복스럽게 먹어야 사랑받는다고 생각했고, 남자들도 처갓집에서 대접을 받으려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허겁지겁 주는 대로 모두 먹어대는 식성을 가져야 했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음식과 먹는 습관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가 많았다.
먹는 것을 권하는 문화, 권한 음식을 모두 게걸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먹어주어야 상대의 눈에 드는 문화…… 개인의 의미들이 존중되고 사회가 변함에 따라 이러한 풍토는 많이 극복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밥상머리에 당겨 앉아 고개 숙여 맛있게 빨리 먹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먹는 것을 통해 사람들은 마음을 열기도 한다. 자기의 표현이 자유롭지 못하고 권위가 밥상을 주름잡는 시대에 밥상 앞에서 행해졌던 전통적인 생각과 식사습관들은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자 하는 수단에서 비롯된 것들도 있다.
현대인의 식탁에서는 자신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고, 식사시간을 빌려 대화를 할 수 있고, 음식의 맛을 음미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음식 먹는 행위의 거품은 빠져야 하고, 지극히 자연스럽고 여유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의 경우는 음식을 두고 형제나 친구와 경쟁을 하거나 빨리 먹으려고 할 때 고개가 숙여진다. 입과 식탁과의 거리가 먼 것도 불리하기 때문이다. 구부리고 식사를 하면 소화기능 또한 떨어진다. 부모가 허리를 펴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식사를 천천히 할 것을 권고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건강의 밑천을 마련해주는 일이다.

 
간식을 좋아하는 습관
 
간식 좋아하는 사람치고 건강한 사람이 없다. 식사 이외의 시간에 계속 무언가를 먹고 있다는 것은 습관의 문제를 지나 병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당장 위에 부담을 주므로 가급적 피해야 한다.
음식물을 소화시키기 위해 계속 일을 하는 위장도 힘들지만, 혈류가 계속 위장 주변에 몰리게 되므로 뇌와 사지 말단에서는 영양과 산소의 부족 증상이 일어날 수 있다. 식곤증, 밥을 먹고 나서 더 피로를 느끼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간식을 하는 사람들은 간식이 일시적으로 기분을 좋게 하는 것같이 느끼지만 실제 일의 능률은 더욱 저하된다. 간식을 먹어야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미 병적인 상황이다. 간식은 설탕과 지방이 많이 들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이러한 간식이 주 메뉴가 될 때 간식은 롤러 코스트와 같이 혈당을 오르내리게 하여 기분의 기복을 심하게 한다.
간식은 활동중에 먹는 식품이기 때문에 부드럽고 달고 간편한 것을 선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모두 뻔한 식품들뿐이다. 인스턴트·가공식품 위주의 간식들은 칼로리를 과잉으로 섭취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하고, 신체의 기능을 혹사시키고 하루 일과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주범이 된다.
간식은 단순히 활동량이 늘어나서 먹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주식이 소홀해졌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며, 주식의 질이 달라졌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다. 섬유질이 풍부한 식품의 섭취는 안정된 혈당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간식의 욕구를 줄여준다. 주식을 바꾸면 간식의 요구도, 의무도, 즐거움의 착각도 없어진다.
간식의 문제도 습관의 문제이다. 간식을 찾기 시작하면 반복적으로 더욱 그렇게 된다. 습관적으로 하는 나쁜 행동들은 어쩌다 부작용이 있다고 예견되는 약 한 번 먹는 것보다 더 나쁘다. 간식은 우리가 지향하는 자연적이고 소박한 식사로의 개선, 최적의 건강을 향한 노력에 위배되는 것이다.

변의를 참는 습관
 
시집에 가면 일주일이 지나도 화장실을 안 간다, 여행을 가면 절대 화장실을 가지 않는다, 더러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느니 참는 게 낫다는 생각에 꾹 변의를 누른다, 변이 빨리빨리 안 나오니까 화장실에 신문을 가지고 간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이 말하는 소리, 기본적인 생리적 요구들을 무시하고 살아간다. 인간의 의지로 통제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인간의 위대성은 익히 알지만, 인간의 의지로 가장 자연스런 인체의 섭리를 저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새삼 반성하게 된다.
낯선 시댁에 가서 긴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스스로가 의식의 노예가 되어, 기회를 만들 생각도 하지 않고 변의를 참고 방치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더러운 화장실의 악취보다 내 몸에서 썩고 있는 대변이 더 괴로운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쯤 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 관념의 노예이고 감각의 시녀이다. 중요한 건 배설하는 자신이다.
 변의를 참는 건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변의를 참는 것 또한 미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자연의 섭리 앞에 아무 때나 의지를 발휘하여 통제하면 그 대가를 온몸으로 체험해야 할 때가 반드시 온다.
변의를 참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변비의 소질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충분한 배변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섬유질이 풍부한 식사와 충분한 물을 마셔야 한다. 또한 환경이 바뀌었다고 대변이 불통될 만큼 장의 운동이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면 이는 약해진 신경이 문제일 것이다. 더욱더 정신적인 이완과 긍정적인 가치관이 필요하다.
신경이 예민해지고 스트레스에 대한 역치가 낮아지는 것은 잘못된 식생활로 인한 영양의 불균형에도 그 원인이 있다. 올바른 식생활을 유지한다면 스트레스에 대한 역치가 높아져 환경변화에 그만큼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게 될 것이고, 배변의 소통도 자유로워질 것이다.
변의는 참지 말아야 하고 자연의 섭리는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배변하는 습관은 언제 어디서라도 규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출처 : 들꽃은 스스로 자란다
글쓴이 : 하으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