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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밥상을 다시 차리자 8

들바람 2007. 1. 4. 02:36
제 6 장 주부들이여, 식탁의 설계사가 되자
 
영양, 그 호사스런 단어
 
영양을 따지는 일은 부족하고 못 살던 시절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낼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영양은 우리에게 아직도 호사스런 단어로 들린다. 아니면 칼로리가 부족했던 시대에 칼로리의 보충을 부르짓던 기존 영양학 덕분에 아직도 ‘나는 영양이 충분해’라고 자신하기도 한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요즘 사람들은 모두들 잘 먹고 있으며, 잘 먹고 있으면 영양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편견 속에 생겨난 듯하다. 그렇게 우리에게 영양이라는 단어는 부유한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의 몸보신을 위해 먹는 영양제의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아니면 충분히 무시해도 될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다루어지곤 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잘 먹고는 있지만 제대로 먹지는 못했기 때문에 삶의 질이 변화하고 있다는 걸 간과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잘 먹는 것뿐만 아니라 제대로 먹는 것을 배워야 할 때이다. 그건 제대로 되지 못한 먹거리를 너무 많이, 너무 잘 먹어 건강을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양이라고 하면 중고등학교 때 배운 대로 먼저 5가지 영양소를 떠올린다. 5가지 영양소를 균형있게 섭취해야 건강하다고 배웠다. 그래서 밥도, 우유도, 고기도, 채소도, 과일도, 생선도 모두 먹고 있기 때문에 언뜻 보면 균형적인 5대 영양소를 섭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두들 영양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무언가를 잘 먹고 있으면 그것으로 영양은 더 이상 문제될 게 없었다.
5가지 영양소를 살펴보면 탄수화물-밥, 단백질-고기와 생선, 지방-기름과 버터, 비타민과 미네랄-채소와 과일이란 단순화된 도식 속에 모두 충분했던 것이다. 밥을 안 먹는 사람이 없고, 고기와 생선을 즐기든 즐기지 않든 조금씩은 먹고 있으며, 기름의 섭취도 넘치도록 하고 있고, 채소는 반찬으로, 과일은 후식과 주스로 늘 가까이했던 것들이다.
그렇게 영양은 도덕적이고 자의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왔다. 영양소의 양과 칼로리를 중요시하는 고전 영양학은 이러한 인식의 확산에 일조하고 있었다.
인생에는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아주 소중한 가치들이 있다. 기존의 영양학은 영양과 관련한 모든 일들이 ‘각기 다른 인간이라는 살아 있는 시스템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먹을 것이 풍족한 시대, 잘 먹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영양을 논하는 일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의 영양실조, 칼로리 부족의 문제나 질병이 있는 사람에게 혹시라도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정도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지금 누군가가 우리는 잘 먹고 있지 못하다고 말한다면, 또는 제대로 먹고 있지 못하다면 그건 엄청난 도전이 된다. 하지만 그건 분명 사실이다. 우리는 제대로 먹고 있지 못하다. 영양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우리는 영양의 불균형으로 발생하는 현대의 무수한 질병 앞에 아웃사이더로밖에 존재할 수 없었다.
질병의 원인을 꿰뚫지 못하면 질병의 치료과정 중 치료의 주체는 소외되고 무기력함과 두려움속에 방황하게 된다. 현대는 제대로 되지 못한 식품들과 칼로리의 과잉섭취로 발생하는 영양의 불균형, 잘못된 식사습관으로 신체대사 시스템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영양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영양이라는 문제는 너무 한정적이고 분석적인 개념이다. 영양문제의 발생은 잘못된 식생활과 생활습관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즉 질병과 건강에 관한 문제는 사람의 생활 전체가 바뀌어야 달라질 수 있다.
사실 좀더 깊게 생각해보면 과학이라는 작은 자로 측정할 수 있는 한계 속에 영양의 개념 또한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우리는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해명되지 않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비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고 평가절하해왔다. 하지만 이제 밝혀지지 않고 있는, 해명할 수 없는 대자연의 섭리 앞에 과학은 겸손해져야 한다.
그렇다고 과학이 이루어낸 그 모든 긍정적인 성과와 우리가 취했던 분석적인 태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체적인 인식을 위해 좀더 폭넓은 시각을 가져야 할 때라는 것이다.
좀더 쉽게 말하면 인간의 먹거리였던 자연적인 상태의 음식들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그런 영양물질들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양이 하는 일들이란 인간이라는 위대한 생화학공장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것들 역시 알 수 없다는 전제가 따른다.
이런 전제들이 있어야 우리들의 생각과 노력이 더 이상 우물 안으로 뛰어드는 개구리꼴은 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이 밝혀놓은 성과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고, 그 속에서 그것이 가진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궁극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발걸음 또한 멈추어서도 안 된다. 나무의 푸르름에 도취되어 숲의 어우러짐을 잊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전체적인 영양이 불충분했던 영양실조의 시대는 칼로리의 보충이 중요했다. 때문에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등 칼로리를 내는 영양소들을 어떻게 섭취해야 하는가에 관한 방법적인 문제와 영양소 상호간의 유기적 변화에 관한 문제를 너무 소홀히 다루어왔다.
비타민과 미네랄에 대해서도 비타민A 결핍은 야맹증, 비타민B1의 결핍은 각기병, 비타민C의 결핍은 괴혈병 등 영양의 결핍증을 해결하는 수준에서 다루었다. 현대인에게 야맹증과 각기병과 괴혈병은 거의 발견되지 않지만 칼로리의 과다섭취로 인한 비타민 결핍증은 잠재적으로 나타나, 그 결핍증상은 모호하고 판단 또한 애매해졌다.
비타민의 필요량은 개인마다 다양하고 수요는 엄청나게 늘어나 있다. 이를 채워줌으로써 질병의 치료에 경제적이고도 안전한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지극히 단순한 이치이다. 비타민과 미네랄같이 식상해 보이는 듯한 영양소들이 현대인의 많은 질병에 대안을 줄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양학은 이제 인간에게 맞는 음식,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음식들을 어떻게 섭취해야 하느냐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야 한다. 이 속에 영양이 만들어낸 궁극적인 건강이 기다리고 있다. 영양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잘못된 식생활과 생활습관의 변화에 그 원인이 있다. 올바른 식생활은 건강한 인간의 몸과 마음과 머리를 만든다.
우리가 먹는 음식물은 빌딩을 올리기 위한 건축재료와 같다. 또 빌딩의 난방과 냉방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운행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잘못된 식생활로 야기된 영양의 불균형은 건강을 해치는 요인들 중에 가장 첫 번째로 꼽힌다
못 먹고 없었던 시절의 고전 영양학이 최소한의 칼로리가 중요시되는 영양실조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모든 것이 풍요롭고 넘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시대의 새로운 영양학은 다양해진 삶과 환경의 변화 속에 사람과의 구체적이고도 유기적인 관계를 기본으로 새롭게 접근되어야 한다.
기존의 영양학이 개개인의 처한 환경과 특성을 미처 생각지 못한 생존을 위한 칼로리 중심의 영양을 생각한 것이라면, 앞으로 우리가 지향하는 영양학은 개인의 환경 등이 충분히 고려되는 대사와 조절의 영양소를 중심으로 하는 학문이어야 한다.
사람이 다르고, 처한 환경이 다르고, 생각하는 경향이 다양해지는 시대에 인간의 영양에 대한 요구량을 어찌 단순하게 표준화할 수 있겠는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표준화된 최소한의 영양 요구량의 개념은 칼로리의 과잉섭취와 영양 불균형의 가속화로 생겨나는 만성질환 앞에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어떠한 형태로 영양의 불균형이 가속화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음식물의 질이 달라진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하면서 식품을 보기 좋게 포장하고 가공하는 일에만 치중해왔다. 식품의 양과 영양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양의 균형과 섭취형태의 문제가 더 중요한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와 같이 식생활의 변화는 결정적인 영양 불균형의 원인이 되고 있다. 영양의 불균형은 점진적인 신체기능의 저하와 결정적인 질병의 발병으로 이어진다. 히포크라테스는 음식물로 고치지 못하는 병은 의사도 고치지 못한다고 했다.
식생활 개선과 영양관리로 많은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확산되고, 그 결과 전인류가 궁극적인 건강과 장수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건강, 너무 평범한 구호
 
건강! 누구나 건강을 소원하지만 누구나 건강을 자신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몸은 매일매일 변화하는 유기체이므로 건강하다는 것은 건강을 잘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을 반(半)건강인이라고 한다. 인간의 삶에 건강으로 가는 길과 질병과 죽음으로 가는 두 가지 길이 있다면, 반건강인이란 건강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삶은 무수한 현상의 연속과정일 뿐 결과가 아니다. 건강이라는 것 또한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가의 방향과 과정의 문제가 중요하다.
건강은 내가 건강하다고 생각해버리면 그만인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건강을 정의하거나 개념짓기는 아주 어려운 문제일 수 있다. 건강은 이렇게 항시적인 개념이 아니라 연속적이고 변화하는 개념이라서 끝없는 건강 희구의 외침은 잦아지지 않는가 보다. 전 인류의 소망은 건강하고 장수하는 것일 것이다.
건강은 가치 피라미드의 맨 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간 최후의 소망이듯이, 오랜 시간 최적의 건강상태를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므로 쉽게 장담하거나 한치의 게으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나쳐 ‘건강 염려증’이라는 현대병을 만드는 시대가 되어버렸지만, 이는 건강한 생활에 익숙지 못한 데서 오는 당연한 스트레스 질병이다.
목사님이 아무 음식이나 먹고 스트레스를 받아 병이 드는 것이나 스님이 사찰 안의 생활을 답답해 여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건강하고자 하지만 건강을 위한 모든 노력이 자신에게 스트레스가 된다면 그냥 되는 대로 살다가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좋은 습관에 익숙해지는 생활 바로 그 자체이다. 건강에 대한 어떤 욕심도, 소망도, 넘치는 자신감도, 어떤 동요도 없는 그런 밋밋한 생활 그 자체인 것이다. 우리는 건강을 의사가 지켜주는 것, 또는 보약으로 선물받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건강을 선물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건강을 선물받을 수 없다.
건강은 질병이라는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쾌적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인을 반건강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료의 발전과는 상관없이 아직도 질병과 죽음의 두려움 속에 있으며, 무언가 쾌적하지 못한 상황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건강을 향해 이루어지는 모든 노력들이 건강에 대한 더 큰 두려움과 공포만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 어떤 해답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질병은 의사가 치료하며, 건강을 지켜주겠다는 의료진의 확신과, 약을 먹으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거라는 약에 대한 신뢰와, 의료가 산업화되면서 만들어낸 온갖 건강 관련 상품 덕분에 이러한 두려움과 공포는 분명 재생산되고 확대되고 있다.
최고의 의사를 찾아다니는 닥터쇼핑 현상, 특효약을 찾아다니는 머나먼 고비용의 여행, 치료를 확신하며 자신하는 저마다의 요법들과 건강 관련 제품들은 이런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 더욱 성행하게 되지만, 결국은 질병의 치료과정 중에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질병의 주인인 치료의 주체를 소외시키고 있다.
건강을 염려하는 자, 병든 환자는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치료자의 말 한마디에 웃고 울고 쓰러지기도 하는 그런 나약한 존재로 더욱 확인될 뿐이었다.
질병과 건강은 모두 내 삶의 결과다. 하루아침에 운이 나빠서 세균에 감염된 것도, 하루아침에 혈액이 탁해져 심장병이 증가하는 것도, 하루아침에 췌장이 나빠져 당뇨병이 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질병은 내가 살아온 결과이다. 앞으로의 건강 또한 내가 살면서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인간은 질병을 통해 정화되어 새롭게 태어난다. 질병은 그만큼 신체의 심각함을 알리는 메시지이다. 질병은 더 이상 미움과 원망,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질병을 통해 그간의 삶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라는 경고와 같다. 더 이상 건강으로 가는 길에 주저하면 더 큰 불행을 초래한다는 충고를 주는 친절함이다.
절망은 질병의 치료를 더욱 어렵게 한다. 질병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질병을 통해 남보다 먼저 삶을 반성하고 인생의 순리를 깨닫게 해준 것에 대해 가슴 깊이 감사해야 한다. 질병은 감사의 마음 위에 새로운 삶의 밑그림을 그려야 낫는다. 그제야 몸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완전한 건강을 자신하지 못한다. 다만 건강으로 가기 위한 그 선상에서 만날 뿐이다. 이 세상에는 단지 건강을 향해 가는 사람, 죽음으로 치닫는 사람,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어차피 누구나 죽는다고 항변할까. 아무리 결과가 중요한 세상이라도 인생 전체를 두고 보면 우리 모두는 과정 속에 있다. 다만 그 과정 속의 만족과 만족을 통해 얻어내는 기쁨의 질이 있을 뿐이다.
내가 건강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인 자의적인 속성 때문에 건강을 정의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정말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저세상으로 가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또 골골 30년이라는 말도 있다. 평상시에 자신의 건강이 위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주의했기 때문에 오래 살아가는 것을 보고 생긴 말일 것이다. 그렇게 건강은 자신할 일도, 두려워할 일도 아니다. 다만 건강으로 가기 위한 지침들을 얼마나 충실히 따르며, 인체의 이치와 삶의 순리를 받아들여 건강을 만들어가는 과정중에 만족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너무나 섣불리, 성급하게 결론에 도달하려고 한다.
건강은 태어나면서부터 유전형질로 물려받는 문제만도, 어느 누가 선물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건강을 만드는 주체는 나 자신임을 자각하고, 건강에 관련한 충분한 조언들을 받아들여 내 삶에 옮기는 것. 여기에 건강과 함께 담보되는 행복이 있다.
건강을 만들어가는 요소들을 살펴보는 일은 반대로 질병을 일으켰던 원인들을 찾아 이를 극복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리라고 본다.
현대인에게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질병은 잘못된 식생활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다. 담배, 술, 스트레스, 환경오염 물질들을 발암물질로,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지적해도 그것은 신체의 특정 기관을 괴롭혀 병의 장소를 지정해주거나 병으로 촉발시키는 계기가 될 뿐이지, 면역이 저하되고 질병이 발생하기까지는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다.
잘못된 식생활을 통해 영양의 균형이 무너지고 대사가 교란되고 신체의 기관들이 혹사당해 발생하는 최후의 통첩이 질병이다. 현대인은 잘못된 식사를 통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영양소의 과부족을 오가며 극심한 영양의 불균형 상태에 빠져 있다. 올바른 식생활은 건강을 지키고 질병을 치료하고 질병의 재발을 막을 수 있는 확실한 무기이다.
인스턴트·가공식품, 화학조미된 음식 등의 온갖 화학물질의 섭취를 막는 것, 공기와 수질과 토양의 오염을 통해 발생하는 환경의 오염원을 차단하는 활동에 함께 하는 것, 이러한 일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자연의 손길과 함께 살며, 그 속에서 숨쉴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연과 더불어 그 고귀함을 되찾게 될 것이다.


갓난아이의 하루
 
갓난아이는 하루 종일 먹고 싸고 자기만을 반복한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이 세 가지 행위는 평생을 두고 언제 어디서도 해야 할 만큼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기본이 되는 것들이다.
잘 먹지 못하거나 잘 배설하지 못하거나 잘 자지 못하면 신체는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대인은 바쁘다는 이유로, 마음이 편치 못하다는 이유로, 번거롭다는 이유로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에 대해 배려하지 않는다.
그래도 된다고 우리의 뇌리 속에 무의식중에 입력하고 있다. 잘못된 생활습관으로 일어날 수 있는 육체의 모든 경고들은 처음부터 시끄럽지는 않기 때문에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일정 정도의 언밸런스를 감당해낼 만큼 신체의 섭리는 위대하다. 하지만 위대한 인체에도 한계는 있다. 너무나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신체의 변화가 어느 날 갑자기 뭐가 뭔지 원인을 해명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버린다.
정신의 우월성이 지배하는 문화는 죽어 쓰러지면 없어질 보잘것없는 육신이란 편견 속에 육체의 메아리들을 무시해왔다. 또한 우리는 그렇게 물질문명을 비난하며 정신가치를 우월하게 평가하는 습성이 배어 내 몸을 고깃덩어리, 물질로만 보기 때문에 이렇게 육체를 홀대하는 경향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우리는 기울어진 문화적 편향 속에 합리성을 잃었고 몸을 관리하는 데 소홀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인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망각했던 것이다.
물질은 정신을 낳고 정신은 물질을 기른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의 몸이고 마음이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음식은 가장 건강한 상태의 정신과 관련되어 있고 그 정신상태는 다시 건강한 육체를 기른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거나 일단 먹어 배만 부르면 되고 맛만 있으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서 영양이라도 따지려면 얼마나 칼로리를 보급하고 있는가, 균형적인 영양소의 배합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한다. 무엇을, 진정한 우리의 먹거리를 먹고 있느냐는 질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균형적이라는 것은 형식적인 미학에 그쳤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우리는 윤택한 삶을 위해 무엇을 먹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쑤셔넣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말이 조금 거칠어도 그건 사실이다. 잠잘 시간도 없이 바쁜데 간편한 식사로 때울 수 있으면 그건 최상의 메뉴로 태어난다. 중요한 것은 음식은 생명을 낳고 기른다는 생각은 해볼 틈도, 인생의 어떤 힌트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배변의 욕구 또한 바빠서, 또는 볼일 보는 자리가 달라지고 불편해서, 아니면 속상해서 등의 이유로 배변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억제하고 배설의 의무를 망각하며 방치하곤 한다. 원활하지 못한 배설기능은 만병의 원인이 된다. 배변의 욕구를 인위적으로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위험한 것이고, 이런 생각도 못 한 채 배설을 어렵게 하는 음식을 먹고 있다는 것은 더더욱 위험한 일이다.
인체의 노폐물을 빨리 배설해야 하는 것보다 더 바쁜 일은 없고, 고약한 냄새와 불쾌한 시설로 변의를 상실케 하는 화장실보다 내 몸 안에서 썩고 있는 변이 더 큰 문제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좁은 땅,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는 잠을 좀 덜 자고 일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교 수험생 시절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렇게 우리는 잠이라는 시간을 빼앗아 뭔가 또 다른 욕구를 채우려 했다.
잠이라는 것은 단순한 휴식, 참아도 되는 그런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고 일하지 않는 깊은 수면상태에서 우리 신체는 고장난 신체의 구석구석을 복구하고 노폐물을 내보내고 내일 사용할 생리물질들을 열심히 만들어낸다. 이러한 일들을 잘 수행하기 위해 충분한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상태를 기초대사율이 높다고 한다. 신체는 리듬을 가지고 있다. 불규칙한 생활습관은 신체의 리듬을 혼란스럽게 하여 내일이 피곤해지고 미래의 건강을 포기하게 한다.
우리 몸이 원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고, 진정으로 몸이 원한 음식을 제대로 먹고 규칙적인 생활의 리듬을 만들어 지켜간다면 더 이상 질병과 죽음의 공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질병이라는 것은 단지 병원에서 진단되는 병명 있는 것만을 말하지 않고, 불유쾌한 신체의 자각증상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최적의 건강은 정신적으로 편안하며, 육체적으로 불편함이 없고, 사회적 활동이 충분히 가능하고, 영적으로 감사할 수 있는 능력까지를 가진 상태라고 세계보건기구가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이제 질 높은 건강의 구현을 위한 세부지침을 마련할 때이다.
건강에 대한 지향이 경제적 풍요 뒤에 무수히 증가하던 질병 앞에서 반성으로 출발했던 서구의 경험을 따라갈 이유는 없다. 만약 지금 젊은 세대들이 나이가 들어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가에서처럼 서구화된 식생활로 ‘병들어 꼼짝 못 하고 누워 있는 노인’들의 수가 증가하고, 평균수명 연장의 공허한 통계만을 지키며 사회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듣게 된다면 이는 꽤 서글픈 일이 될 것이다.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굵고 짧게 산다지만 내 마음대로 죽음을 앞당기거나 마감할 수는 없다. 이 부분에서 인간은 좀더 솔직해져야 한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생명을 연장시켜놓은 것이 현대의학의 발전이다. 또 죽기 전날까지도 하루를 더 살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라고 한다.
혹여 올바른 식생활이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참아내는 그런 숨막히는 인고의 시간이 될 거라는 오해는 없길 바란다. 인간을 위한 식사는 극히 자연스러운 상태에 익숙해지는 것이므로 거기에 한번 익숙해져버리면 더 이상 불편하지 않게 된다.
거기에는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갈구하는 육체적 건강과 마음의 평화가 있다. 이런 모든 노력이 단지 죽는 그날까지 건강하여 떳떳할 수 있기 위해서라면 너무 거창할까.

밥상이 만드는 몸과 마음
 
인체의 신비를 따라가는 여행은 그 길을 따라가는 여행자를 숙연하게 한다. 죽으면 한줌의 흙이 되는 보잘것없는 육체라고 우리는 육체를 혹사시키는 일들, 대충 먹거나 많이 먹고, 늦게 잠들거나 안 자고, 대소변을 참아버리는 일들을 서슴지 않지만 우리 몸이 혼신으로 외쳐대는 그 안의 질서와 철학은 큰 가르침을 준다.
인간의 좁은 시야는 모든 물질의 양면성과 통일성을 이해하거나 실천으로 옮겨내기 어렵게 하지만, 물질문명으로 치닫고 또다시 반성을 통해 정신의 소중함이 강조되는 역사를 거듭하면서 통일적인 인식의 세계로 나아간다.
스피드와 경제적 성공이 최고의 가치로 대접받는 시대에 또다시 느림과 단순함의 미학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반대급부적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다양성이 융화하여 통일적인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기 위한 뿌리 깊은 반성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밥이 보약이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해왔다. 하지만 이는 질병의 치료에 있어서 특별한 치료약이나 뾰족한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용되곤 했던 극히 체념적인 경험과 표현이었다. 희랍의 의성 히포크라테스 또한 “음식으로 고치지 못하는 병은 의사도 고치지 못한다.”라는 말 속에서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실 밥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먹는 밥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밥은 살기 위해 그냥 먹는 것일 뿐이고 몸은 몸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밥이 약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밥이 약이라는 말 속에는 그것이 지극히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음식의 기능적인 면만을 강조한 측면이 없지 않다. 질병의 치료약의 개념으로서 음식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경제적이고 안전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위에서 육체와 정신의 양면성을 이야기하고 스피드와 느림의 대조를 포함하여 다양성과 통일성이 어우러지는 고유의 역할을 강조했듯이, 우리가 매일 먹고 있는 음식의 역할을 현대 의학적 약물의 개념으로 이해하기에는 그 한계가 너무 뚜렷하다.
인체를 운행할 수 있는 기능과 몸을 만들어 신체구조를 이룰 수 있는 역할 모두가 음식에 있다. 그렇게 음식은 신체의 구조와 기능을 모두 아우르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고, 인체와 인간의 삶이란 결국 우리가 먹는 음식의 통일적인 실체이다.
우리가 먹는 것은 곧 살이고 뼈이고 피이다. 또 우리가 먹는 것은 기쁨이고 슬픔이고 마음이고 정신이다. 이렇게 정신적인 요소까지도 먹는 것에 의해 만들어지는 호르몬과 신경전달 물질과 같은 화학적인 물질변화에 의한 것이다. 음식은 몸을 낳고 정신을 기른다. 먹는 것은 약이 되기 이전에 몸이 되고 마음이 된다.
먹는 것이 약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음식의 기능으로서 질병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고, 몸의 구조와 성질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이 곧 체질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병이 되는 체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병이 되는 체질이 되도록 그렇게 먹고 마신 삶의 결과이다. 음식을 약으로만 이해한다면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하는 일은 아픈 사람들만의 몫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음식은 절대 질병 이전의 과제이다. 잘못된 식생활이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몸의 구조를 만들고 기능을 혼란시켜왔던 것이다.
신체는 각 기관과 기관을 이루는 조직과 조직을 이루는 100여 조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인체의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의 건강이 조직의 건강이고, 조직의 건강이 기관의 건강이고, 각 기관의 건강이 인체의 건강이다. 인간의 대부분은 모든 기관이 쇠퇴해서 죽는 게 아니다.
어느 한 기관을 혹사시키는 생활로 인해 그 기관이 더 이상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면 다른 기관과의 연관성, 모든 생명의 사슬은 끊어지고 죽음으로 치닫게 된다. 세포단위의 건강이 중요하고, 모든 조직과 기관이 무리하지 않고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세포를 둘러싸고 있는 세포막은 단백질과 지방이라는 영양소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먹느냐에 따라 세포막의 구성이 달라지고 세포막의 고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질과 수준이 달라진다. 세포 내에 있는 소기관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먹는 것은 곧 신체구조를 이루는 성분이 되고, 때문에 먹는 것은 신체에 적합한 것이어야만 한다. 적합성의 유무는 인류가 수만 년 전부터 먹어왔고 조상 대대로 먹어왔던 것들에 대한 기록을 유전자에 남겨놓음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백 년을 채 살지 못하는 현인류의 수명은 그 유전인식을 뛰어넘어 또 다른 먹거리와 생활습관을 요구할 만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휘발유를 넣어야만 자동차가 갈 수 있듯이 우리 몸에서 휘발유에 해당하는 것은 음식이다. 모든 가전제품과 차에도 열효율이 있듯이 인체도 마찬가지이다. 에너지를 효율적이고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음식의 섭취는 신체의 리듬에 맞추어져야 한다. 인간에게도 생명의 존엄성이 있고 고유의 지위와 역할을 가지고 살아가듯이, 인체의 각 기관의 존재 또한 나름대로의 이유와 역할을 가지고 있다.
또한 사용하지 않으면 녹슬어버리거나 너무 사용하면 빨리 마모하는 물질의 속성이 인간의 신체에도 있다. 인간이라는 자동차가 열효율을 높이고 하루도 쉬지 않는 인체의 운행을 꾸준히 하려면 인간에게 적합한 음식을, 우리 몸이 원하는 방식으로, 신체 각 기관들이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섭취해야 한다.
입이 있는 이유가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라면 치아와 턱이 있는 이유는 씹으라는 것이고, 치아의 구성이 육식동물의 날카로운 송곳니와 다른 것은 인간의 음식이 곡채식에 더욱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곡식과 채식 위주의 식단을 야무지게 씹어서 넘기는 것부터가 오묘한 인체의 운행의 시작이다. 씹을 것도 없는 도정하거나 가공된 음식이 판을 치고, 꼭꼭 씹어먹을 만큼 시간적인 여유도, 어떠한 가르침도 주지 않는 현대인의 식생활이 이대로 유지된다면 인간의 삶이 어디로 인도될지는 자명한 일이다.
인간이 음식을 씹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부드럽고 달콤함으로 유혹하는 모든 식품과 음식들, 늘어난 위를 서슴지 않고 잘라냄으로써 식사량을 줄이겠다는 기상천외한 발상과, 장의 고유의 운동성과는 상관없이 일단 빼내고 보자는 설사요법과 같은 처참한 시도들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영원히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체질을 바꾸는 것, 질병을 이겨내고 정신을 맑게 하고 새로 태어나고 싶은 것 모두가 우리가 먹는 음식을 바로잡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이렇게 우리가 매일 맞는 밥상은 우리의 몸을 만들고 마음을 만들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세계로 운전해가는 것이다.

 
세대에 따라 달라지는 식생활
 
전후 세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리밥은 향수가 아니다. 질리도록 먹었던 꽁보리밥과 고구마밥과 옥수수죽, 시래기죽 같은 건 기억에서조차 지우고 싶은, 다시는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최고의 밥상은 아직까지도 가을 들녘 햅쌀의 윤기나고 고슬고슬한 흰 쌀밥과 고깃국이다.
아직도 고기를 접대해야 최고의 정성으로 인정받는 세상이지만 그들의 귀에도 육식의 과다섭취는 문제가 되고, 잡곡밥이 좋고 소식이 좋다는 이야기가 울려퍼지고 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못 먹었던 것에 대한 보상처럼, 현재와 같이 풍요의 시대에 그것들을 먹을 수 없다면 이는 억울하고 손해보는 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한편 서양 문화의 유입은 서양인의 큰 골격과 단발적인 힘을 닮기 위해서라도 육식의 섭취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 먼저 늘어나는 것이 육류의 소비이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존립을 위해 새로운 관념을 만들 듯이 그들은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라는 자기 수호의 이데올로기까지 만든다.
그래서 부모를 모시고 사는 젊은 세대들은 부모님 때문에 잡곡밥을 먹을 수가 없고, 육류가 상에 오르지 않으면 반찬도 없다고 노여워하시는 부모님에게 맞추지 않을 수 없다고 속타는 가슴을 털어놓는다.
미국 영양특별위원회 맥거번 보고서의 곤도 박사 증언한 것처럼, 전쟁 경험자가 요절하는 원인은 영양과다 때문이라고 한다. 성장기의 음식에 대한 기억과 습관은 영양의 균형과 건강의 실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이렇게 어린 시절의 기억과 함께 자기 심상의 포로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아이들의 식습관이 평생의 건강상태를 좌우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 다음에도 우리는 현기증이 나도록 황홀한 포로가 된다. 상업적 광고와 무분별하고 잘못된 건강정보 앞에서 말이다. 그 맛있는 전략 앞에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배고팠던 시절에는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의 포로가 되었듯이, 이젠 황홀한 입맛을 찾아 음식의 노예가 된다.
내가 어떤 것을 먹느냐에 따라 내 생각이 바뀌고 내 몸이 달라진다. 때문에 자신의 변화와 발전을 꾀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먹고 있는 것에 대한 관심과 정보가 있어야 하고, 식품을 선택하고 음식을 만들 때는 올바르고 타당한 판단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전쟁의 참혹함을 인내하며 견뎌온 전후 세대들은 자식을 위해 또 한 번의 인내를 각오한다. 내 어린 시절 먹거리에 대한 기억이 참혹했던 만큼 이것만은 절대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게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전후 세대들은 그들의 자식에게 흰 쌀밥을 주고, 고기를 많이 먹이고, 여유가 되는 대로 맛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찾아 먹였다. 빵과 부드러운 케이크, 과자와 아이스크림…… 모두 없어서 못 먹었던 것들이다.
또 전후 세대의 희생을 딛고 살아온 20∼30대의 젊은 사람들은 무조건 공부 잘해서 성공하는 것만이 최상의 것이라고 세뇌되어왔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부모의 희생에 대한 보답이고 효도였다.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내가 먹는 먹거리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을 가질 수 없었고, 먹는 것을 준비하는 모든 시간을 아깝게만 생각하게 되었다. 오로지 건강이 염려될 때만 식품의 위대한 경고를 기웃거리는 그런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린 것이다.
먹을 것을 준비하는 일, 내가 입을 옷을 해결하는 일, 내가 살고 있는 집을 가꾸는 일 모두가 해본 기억이 없다. 그건 단지 부모님의 일이었고, 결혼을 한 후에도 이것은 자신의 일 같지 않다. 결혼 초엔 음식백과를 뒤적이고 선배들의 이야기라도 들어가며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보려고 애쓰지만, 이것도 신선한 신혼의 단꿈이 사라지고 주방에서의 아슬아슬한 고비들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버린다.
그러고 나면 나는 무엇인가 하는 허무함에 빠지게 된다. 어디에도 내가 없다. 삶의 기본적인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고 보잘것없는 수준 낮은 일에 봉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젊은 주부들은 방황한다. 시간이 나면 문화센터로, 헬스센터로, 자신을 달래줄 그 무언가를 찾아…….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라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 생활이 힘들어지게 되어 있다.
내 삶의 기본이 되는 요소들을 해결하는 시간 속에 삶의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밟으며 훈련되지 않으면 그 무엇도 공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독서가 어떻게 취미가 될 수 있느냐는 반문을 들은 적이 있다. 독서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누구나 해야 하는 기본 덕목이지, 어떻게 그것이 특정한 누군가의 취향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말은 독서를 안 하는 사람이 문제이지 독서를 하는 사람의 취미나 자랑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인 것 같다. 나는 요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요리는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문제이고 일정 시기가 되면 누구나 자신의 먹을거리는 자기가 책임질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한다. 다만 한 가정에서 서로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어느 한쪽이 전담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신세대 주부의 최고의 베스트셀러이며 스터디셀러인 요리책들이 보여주듯, 우리는 어려서부터 요리에 훈련되지 않아서 요리라는 그 호사스런 말만 들으면 무조건 기죽어 한다.
요리를 할 줄 모르는 엄마가 아이를 낳아 할 수 있는 일이란 대중광고로 익숙해지고 이용이 간편한 인스턴트·가공식품의 사용이다. 이렇게 음식을 못 하는 주부와 엄마를 편하게 해주는 식품산업의 발달은 잔병치레 많은 아이, 젊은 나이에 쓰러지는 남편을 만들었고, 또 이는 의료산업이 발전하도록 크게 기여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게 했다.
이렇게 현대의 음식들은 먹으라고 만들어졌으니까 모두 먹어도 되는 것이 아니며, 먹으라고 있는 입이라고 아무거나 내 소중한 육체에 집어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먹는 것, 내 가족이 먹는 것을 손수 만들지 않으면서 건강을 위해 헬스센터를 찾는 것은 순서가 바뀌어도 단단히 바뀐 듯한 느낌을 준다.
주부의 역할은 이렇게 크다. 주부의 생각과 실천으로 아이가 살고 남편이 산다. 그 삶의 과정에서 주체가 된 기쁨을 맛보며 주부도 산다. 배운 적 없고 할 줄 모르면 지금부터라도 배우면 된다. 음식의 중요성을 배우고 영양의 중요성을 배우고. 건강은 하루아침에 누군가로부터 선물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 대한 정성과 노력으로 하루하루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도 배워야 한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라고 했던가. 질병도, 건강도 내 삶의 결과이다. 내가 무엇을 먹어왔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행동해왔는가에 대한 결과이다.
음식의 재료를 준비하는 시간을 내고 직접 식탁에 오르기까지 가볍게 조리하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이런 시간을 아까워하는 사람은 더 큰 본질적인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아이가 떠나가고 남편이 멀어져간다. ‘인생은 다 그런 거야’라고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이렇게 우리의 밥상은 부모 세대로부터 자신을 거쳐 자식의 세대까지 세습되고 더욱 화려해지고 있다. 어느 한 세대는 이렇게 악순환되고 있는 사슬의 한 부분을 끊어 진정한 밥상을 다시 차려야 한다.

달라진 밥상
 
“아침에 무엇을 드십니까?” 하고 물으면 “입맛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간편한 걸로 대충 때우죠”라고 말한다. 젊은 세대의 아침식사는 대체로 준비하기 쉽고 먹기 편리한 빵과 콘플레이크와 우유로 많이 대치되었고, 아니면 굶는 경우도 허다해졌다. 물론 아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케첩 범벅을 해줘야 좋아하고 불갈비햄이나 지져줘야 젓가락이 바쁘다. 점심은 급식이나 외식을 하게 되고, 젊은 부부들은 저녁마저도 외식을 통해 서로를 위하고 사랑을 확인한다.
식사를 준비할 이유도, 음식을 만드는 것을 배워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주부들의 바쁜 생활과 외식산업의 발달은 가히 초고속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스피드와 경제적 성공만이 최대의 이슈가 되어버린 현대인의 삶은 여유 있는 삶, 내가 먹을 것 내가 준비하고 만드는 일을 모두 구닥다리 일들로 평가절하해버린다.
서구의 패스트푸드 추방운동에 밀려 반건강산업으로 낙인찍힌 패스트푸드점,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사업은 우리같이 음식문화 의식의 후진국에서 날개를 펴고 현대인의 바쁜 생활을 틈타 그 영향력을 크게 키우고 있다. 이렇게 먹는 것까지도 또 하나의 문화적 종속을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내 손으로 먹고는 있지만 인간의 진정한 음식의 섭취라는 주체적 의미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우리의 오늘 밥상을 돌아보자. 흰 쌀밥, 아니면 괜한 양심의 가책으로 잡곡 몇 개를 심은 잡곡밥, 달걀찜과 콩나물, 멸치볶음과 김치 등등. 이렇게라도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주식이 변하고 있다.
섬유질과 필수의 영양분이 모두 제거된 흰 쌀밥과 흰 밀가루 음식들, 빵, 라면, 피자, 콘플레이크, 햄버거 등으로 우리의 식탁이 가득하다. 대형 할인마트에 가보면 엄청난 가공식품의 종류에 놀라곤 한다. 하지만 좀더 면밀히 생각해보면 그건 온통 태평양을 건너온 수입 밀가루로 만들어진 식품과 화학첨가물 덩어리일 뿐이다. 이건 다양한 식품이라 말할 수 없다. 또한 부드러운 간식도 주식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밥상에서 영양이 사라져갔고, 주식과 부식과 후식의 개념도 사라졌다. 오로지 배만 부르면 되고 맛만 있으면 되고 더욱 예쁘게 장식만 할 수 있으면 최고의 밥상이 되는 것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옛말은 ‘보기 좋은 떡은 건강에 나쁘다’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
밥 안 먹는 아이를 유혹하기 위해 엄마들은 단지 달콤한 밥상을 꿈꾼다. 아니, 그것이 엄마들이 좋아하고 먹고 싶었던 음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젊은 부부들이 그러한 음식을 흠모하기도 한다. 이렇게 밥상 아닌 밥상으로 우리는 하루를 지탱하고 있다.
약간의 외로움은 아이의 두뇌를 발달시킨다고 한다. 세월을 보내고 삶을 살아갈수록 모자람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약간 부족한 듯 키워야 아이가 강해진다. 이건 정신적 훈련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양과 건강에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좀 부족하고 모자라는 듯한 영양은 채움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잘못된 식생활로 망가진 몸은 몸을 보수하고 몸 안의 화학물질들을 제거하느라고 두 배 이상으로 노력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 좋은 것은 과감히 안 먹일 수 있는, 온통 인체에 불리한 나쁜 음식들뿐이라면 차라리 굶길 수 있는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요즘의 엄마들은 아이들을 혼자 방치해서는 안 되며 엄마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나름대로 두뇌의 회로를 돌리게 된다. 아이들을 사랑 없이 방치하는 것이 문제이지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차단하는 것은 부모의 욕심일 수 있다.
모든 것들이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지나침이 문제이다. 오랜 시간 아이들을 방치하여 그들이 사무칠 정도로 외로움을 느낀다면 문제지만, 적당한 외로움은 아이를 성숙하게 하는 고귀한 시간이 된다. 시간적 공백과 영양의 공백이 필요하다면 과감해질 수 있는 부모의 용기가 필요하다.
아이들의 잘못된 입맛을 쫓아가 무엇이 됐든 일단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배고픔의 체험을 주고, 먹을 것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경험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아이도 좋은 먹거리를 먹을 권리가 있고 엄마에게는 이를 선택해줄 의무가 있다.
재미있는 방송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세상에서 남자의 정력을 가장 떨어뜨리는 음식이 뭐냐는 문제였다. 정답은 아내의 저녁식사라고 했다. 너무나 기가 막혀 한참을 웃으면서 씁쓸해했다. 남편이 집에서 저녁식사하기를 꺼려한다는 말은 예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 요리 못 하는 아내의 음식을 먹어주는 고통은 정말 힘들다는 등…….
그러나 이 사회의 남자들도 한 가정의 주체로서 먹는 문화에 대한 주체적인 발상의 전환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시간 동안 집안일을 돌볼 수 있는 주부들이 많은 노력을 통해 식탁을 잘 운영하길 바라지만 어디 집안일이 여자 혼자만의 일인가. 일하는 여성도 많고, 주부도 가사의 일을 줄여 재투자와 교육의 시간도 필요하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남자들은 여자들이 무심코 음식을 만드는 일에서 멀어져갔듯이, 여자와 남자의 일을 분리하는 관습에 젖어 배우지 않고 먼저 이끌지 않고 불평만 늘어놓고 있다. 여자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남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이 말에도 틀린 구석이 있다. 남편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남편들도 내가 먹고 사는 일에 대해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기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부부라는 관계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하여 가정을 이루는 데 필요한 모든 일들을 나누거나 함께 공유하게 된다. 일을 갖지 않은 여성은 주부로서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내며, 그것 또한 하나의 직업으로 선택한 것이다. 때문에 주부는 가정의 일꾼으로서 프로로서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 아니, 이보다 중요한 것은 가정의 주부나 남편 모두 인간으로서 삶을 연장시켜주는 기본이 되는 일들에 대해 인식을 같이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들을 누가 대신해줄 수 있다는 발상 자체 때문에 먹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역할의 양분과 책임 소지를 따지는 일들이 벌어진다. 주부는 상업적 광고에 매달려 밥상을 차리고,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먹는 것에 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떠넘기니 말이다.
남자가 음식에 대해 잘 알고 이 얘기 저 얘기를 건네다보면 쫀쫀한 사람처럼 비쳐진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힘센 남자는 나가서 사냥 같은 스케일이 큰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음식을 준비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을 하는 등, 원시시대 노동의 분화로 인한 역할분담 속에 나타난 관념일 뿐이다.
이제 남자들도 내가 먹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할 때이다. 그러한 생각들은 가정에서의 역할과 아내에 대한 생각을 변하게 하여 건강한 가정을 만드는 데 일조하게 될 것이다. 음식의 재료를 준비하고 밥하는 일은 어느 한 사람이 할지언정 우리 가족의 밥상은 주부와 남편, 부부가 함께 차리는 것이다.

먹는 것이 병이 되는 시대
 
현대의학의 발전은 많은 세균성 감염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역사가 이반 일리히는 그의 유명한 저서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더 본질적인 세균성 질환의 감퇴원인으로서는 주택의 개선과 미생물 유기체의 독성 감퇴 등이 지적될 수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영양이 개선되어 인간의 저항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사람의 건강상태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환경’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현대의 질병의 변화와 그 추세를 보면 더욱 그렇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 세균성·감염성 질환까지도 모두 백신으로 예방하거나 약물로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영양의 개선과 함께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현재 세균성·감염성 질병이 다시 증가하고 있을 정도로 잘못된 식생활로 인한 영양의 불균형이 가속화되고, 이로 인한 면역기능의 저하가 한편에서 심각하게 늘어나고 있다.
사실 잘 먹고 있으며 영양의 풍요라고 생각하는 이 시대에, 간염 백신을 안 맞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지만 간염 발생률은 줄지 않고 있으며, 세균성 질병들은 다시 유행하고 있다.
또한 식품의 질의 변화와 잘못된 음식, 화학첨가물의 섭취 등으로 신체의 대사리듬이 혼란스러워지고, 이로 인해 야기되는 만성적인 대사성 질병의 증가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급속히 증가하는 대장암·직장암·유방암을 비롯한 암의 발생과 당뇨·동맥경화·고혈압·심근경색, 원인 모를 면역질환 등 만성병의 대부분이 식생활과 관련된다. 이렇게 현재는 먹는 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질병을 앓고 있는 식원병의 시대이고, 잘못된 식생활 습관이 문제가 되어 질병이 되는 생활습관병의 시대이다.
어른에게서만 발병한다고 해서 성인병이라고 불리던 것들이 이제는 만성병과 식원병이라는 표현으로 대치되고 있다. 아이들에게서도 혈액암이 증가하고 당뇨와 동맥경화증, 골다공증이 증가하고 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많은 아이들에게서 잘못된 식사습관으로 인해 성장과 면역에 장애가 발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격의 변화와 정신적인 문제까지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식품첨가물의 최대의 피해자는 아이들일 수밖에 없다. 식품첨가물이라는 화학물질은 술취한 상태에서 술이라는 화학물질이 배설되기 전까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조절할 수 없듯이 그렇게 아이들의 마음과 행동을 분리시킨다. 인스턴트·가공식품·청량음료 등으로 섭취하는 수없이 많은 화학물질들을 제한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은 엄마밖에 없다.
식품에 첨가하는 식품첨가물이라고 해서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에 첨가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식품첨가물의 대부분은 화학물질로 동물실험에서 조직적인 변화가 확인되지 않으면 사용이 허가되는 무책임한 행정의 산물이다.
어느 정부도 우리가 섭취하는 식품첨가물의 총량을 계산해내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표시기준조차도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지 않다. 우리는 모두 언제든지 부작용이 입증되기만 하면 사용이 중단될지 모르는 화학물질들을 섭취하며 임상실험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
식품첨가물이 맛을 내고 향을 내고 보존기간을 늘려 인류의 식량문제 해결에 기여했다고 하더라도, 화학물질은 우리 인체의 입장에서 볼 때는 낯선 이물질이며 빨리 해독시켜 몸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물질이다.
그 해독과 배설과정에서 소모되는 영양분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모든 면역과 성장에 관한 일들은 뒤로 미루어지게 되고, 신체는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산만해지고 어쩔 줄 모르고 어떤 생각도 없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를 행동의 독리현상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식생활에서 발생한다. 도정하거나 가공하면서 잃어버린 필수의 영양과 대사상의 혼란, 화학물질의 무차별한 유입에 의한 신체의 교란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독일의 주부들은 옆집 아줌마가 자신의 아이에게 과자를 사주면 화를 낸다고 한다. 이렇게 내 아이가 먹어야 할 것과 그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 주부들도 지혜롭고 당당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
올바른 식생활은 우리 아이들을 건강하게 지키고, 질병을 예방하며, 성장을 돕고, 사회적으로 성숙한 아이로 길러낸다. 이렇게 올바른 식생활은 정신도 육체도 건강한 아이를 키워내며, 주부들의 의미 있는 삶을 보장하고, 왕성하게 일해야 할 시기의 남편을 건강하게 지켜줄 것이다.

 
체질을 탓하지 말고 신경성이라고 포기하지 말자
 
모든 학문은 그 체계 안에서 훌륭하다. 하지만 인간의 유기성을 생각하지 못하고 학문이 자기 세계만을 고집할 때 인간을 위한 학문이라는 대명제 앞에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체질을 음과 양의 체질로, 네 가지의 사상체질로 나누어서 논하는 한의학적 논쟁들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에 대한 판단을 어지럽게 하곤 한다. 어떤 음식은 몸에 맞고, 어떤 음식은 몸에 맞지 않고…… 체질에 따라 먹는 음식을 찾다보면 식단을 마련하기 힘들다. 이건 음식을 먹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오히려 식품의 노예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진정한 학문은 인간의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주고 실천과 새로운 변화를 향한 동력을 실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체질논쟁은 삶의 주체로서 인간의 활동을 소극적이고 체념적인 상황으로 몰고 간다. 체질은 고정불변의 상황이 아니라 바뀌는 것이다. 급속한 사회환경의 변화는 우리 몸의 성질 자체를 빠르게 바꾸어놓고 있다. 이 부분은 학문적 문제보다 한의학적 부분이고 편협하게 소비자들 속에 왜곡되어 전파되면서 생긴 문제들로 보인다.
한의학의 이론은 현대인의 급격한 식생활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음식의 질이 달라지고 정백식품과 가공식품을 먹고 사는 현대인의 체질은 이미 학문이 밝혀진 시대와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현대는 많이 먹는 것이 문제인 시대이고, 변질된 미각으로 골라먹는 것이 문제가 되어버린 시대이다. 현대인이 지방과 당분의 과량 섭취로 췌장질환이 치명적인 수준까지 증가해도 췌장질환과 같이 잘못된 식생활과 환경오염 물질이 증가함에 따라 발생하는 질병에 대해 한의학이 구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역으로 학문은 시대상황과 함께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발전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체질에 따라 소개되는 음식들은 그 역할을 분명히 하여 질병의 치료를 돕는 방법으로 소개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일반인에게 있어 체질논쟁은 공허하고, 주체적인 먹는 문제로부터 소외현상을 낳기 때문이다. 한의학적 체질의 구분은 한의학이라는 학문과 의학이라는 진단과 치료의 세계 속에 남겨져 있어야 한다.
체질 때문이라는 한의학적 진단을 받고 나면 어떤 음식에 대한 적극적인 섭취가 유리하다고 처방되지만 이는 거의 비현실적이다. 아무리 체질에 맞고 몸에 좋다고 해도 그것만을 먹고 살 수는 없다. 우리가 인간에게 적합한 음식을 제대로 먹고 있었다면 한의학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도 그 음식들은 서로 음양이 상쇄되거나 영양학적으로도 보완되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의 식생활은 시장의 공급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내 입맛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공허한 진단과 처방은 환자를 치료과정에서 무기력하게 하며 소외시킨다.
체질은 그렇게 삶을 포기하듯, 부모의 유전 탓으로 넘기듯, 운명을 탓하듯 그렇게 체념적이고 우울한 개념이 되어버렸다. 어느 체질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어느 체질이나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다. 인생은 다 그렇고 그래, 체질대로 운명대로 살다 가는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체질은 과연 무엇인가. 체질은 몸의 성질, 체세포의 성질을 말한다. 인간의 몸은 커다란 기관들과 기관을 이루는 조직, 조직을 이루는 100여 조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세포는 지방과 단백질이라는 세포막으로 쌓여 있고 그 세포 안의 소기관들도 모두 영양물질을 기본으로 만들어지게 되어 있다. 즉 체세포의 성질은 먹는 것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어떤 기름을 먹었느냐에 따라 세포의 질이 달라지고, 어떤 음식을 섭취했느냐에 따라 그 세포의 탄력과 유동성과 투과성과 반응성 모두가 달라지는 것이다. 체질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먹는 것이 달라지고 인체가 반드시 필요로 하는 필수의 영양물질들로 교체되기 시작하면 곧 체질도 달라진다.
인체는 1년이라는 시간 동안 98%의 세포가 교체된다고 알려져 있다. 1년이라는 노력을 들여야 비로소 세포는 새로운 세포로 교체되는 것이다. 체질은 자연적인 인간의 식사를 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타고날 때부터 주어져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고정불변의 상황은 아니다.
인간의 자연치유력은 스스로 극한적인 상황을 조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설사 태어날 때 불리한 요소들이 있을지언정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적합한 자연적인 식생활을 지킨다면 인간은 그 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보완하고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체질을 탓하지도 말고 체질을 약으로 바꾸려고 하지도 말자. 체질은 한약 몇 재 먹는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다. 체질은 내가 먹는 음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할 때 산성·알카리성 체질 논쟁에 또 한 번 빠지게 된다. 사실 산성·알칼리성을 논하는 체질의 ph는 그렇게 쉽게 균형을 깨뜨리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체액은 ph 7.35∼7.45라는 약알칼리성 상태를 언제나 일정하게 유지한다.
체액이 ph 7.35 이하이거나 ph 7.45 이상 쪽으로 조금만 이동해도 신체는 아주 위험한 지경을 초래하게 되므로, 그 전에 스스로 체액을 약알칼리성으로 유지할 수 있는 자동조절 장치를 가지고 있다.
산성식품을 많이 먹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산성물질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자꾸 칼슘과 마그네슘과 같은 미네랄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즉 일반 사람들이 체질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은 곧 칼슘과 마그네슘 같은 미네랄의 결핍증상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약알칼리성 체질로의 변화는 육류, 우유, 달걀, 정백식품, 설탕과 같이 산성의 화합물을 많이 만들어내는 식품의 섭취를 줄이고 칼슘, 마그네슘과 같은 미네랄이 풍부한 식품을 적극적으로 섭취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체질을 몸의 성질, 체세포의 성질이라는 본질적인 의미와 좀더 생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지방의 섭취에 따라 달라지는 구조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세포의 질이 조직의 질을 말하고 조직의 질이 기관의 질, 신체 전반의 체질을 말한다.
세포를 싸고 있는 세포막은 지방과 단백질로 구성되어 물질의 투과성과 세포의 유동성, 국소 호르몬의 분비 등에 관여한다. 즉 세포막의 상태가 건전해야 우리가 먹은 영양물질이 세포 내로 잘 진입하며, 세포 안에서 발생한 대사물과 노폐물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고, 외부의 자극에 국소적인 호르몬을 만들어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세포막의 단백질은 쉽게 변질되지 않는 것에 비해 지방은 쉽게 산화적 손상을 받아 변질되기도 하므로, 어떤 지방을 먹느냐에 따라 그 세포막의 성분이 달라지기 때문에 어떤 지방을 어떻게 먹느냐는 지방섭취의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지방에는 고체상태의 육류지방과 액체상태의 식물성 기름이 있다. 식물성 기름에는 신체가 만들어내지 못하는 필수의 지방산들이 있는데, 이는 극히 불안정하여 쉽게 변질된다. 변질되지 않은 좋은 지방산들이 어떻게 섭취되느냐에 따라 세포막의 구성이 달라지게 된다.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식용유를 먹고 있고, 그것도 고열과 고압 속에 변질되거나 가공된 기름의 섭취를 즐긴다. 이렇게 잘못된 지방섭취가 우리의 체질을 바꾸어놓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지방의 이용으로 세포가 굳어지고, 물질이 이동과 순환이 방해받고 과민성 상태가 되어 알레르기 질환이 증가한다. 체질을 바꾸는 것은 식생활을 바꾸는 일이다.
체질은 체념적이고 소극적인 인식으로부터 극복되어야 하고, 산성·알칼리성 논쟁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지방섭취의 논쟁, 잘못된 식생활에 대한 문제제기로 확대되어야 한다.
‘한 방울의 팜유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둥, ‘콜레스테롤이 없다’는 둥의 기만적인 상업적 광고는 소비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 식물성 콩기름에는 강조할 것도 없이 원래 콜레스테롤이 없다. 지금 팜유를 쓰지 않고 있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몸에 좋지 않은 것을 써왔다는 것인가.
정신을 차려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어야 한다. 더 이상 체질을 탓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자.
실제로 질병으로 진단되기 전까지 환자들의 방황은 끝이 없다. 불치의 병들은 진단되어도 사실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닥터 쇼핑현상은 계속된다. 현대의학으로 진단될 수 있는 질병들은 일정 시간이 경과해서 기질적인 손상으로 발전해야만 확인된다. 하지만 영원히 현대과학의 발달로는 측정하기 어려운 상태의 질병들도 무수히 많다.
환자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깨닫기까지는 많은 비용과 시간을 지불한다. 동네 의원에서, 동네 병원으로, 종합병원으로, 대학병원으로, 한의원으로, 건강식품점으로 그 행렬은 끝없이 계속된다.
공통된 진단결과는 ‘신경성’이라는 것. 큰 중병이 아니라 단순히 신경성이라고 하니 돌아오는 발걸음은 얼마나 가볍고 얼마나 다행인가.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이건 단순한 신경성만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또다시 불안과 함께 다음 행렬을 이어간다.
이렇게 환자들은 ‘신경성’이라는 말에 위로받기도 하다가 진단되지 않는 갑갑함에 절망하기도 한다. 누구나 신경은 쓰고 사는데 나는 왜 그럴까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진단과 치료를 위한 행렬을 쫓아다니게 되는 것이다.
신경이 쇠약해지는 데는 성격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도 존재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경계를 약하게 만들었던 오랫동안의 잘못된 식생활에 그 원인이 있다. 식생활이 잘못되어 있으면 작은 스트레스에도 쉽게 무너진다.
식생활을 바꾸면 신경이 튼튼해진다. 스트레스는 긍정적인 자극으로 그 모습을 바꾸고 부정적인 스트레스에 대한 역치가 높아져 어지간해서 신체는 쉽게 반응하지 않는 수준이 된다. 이런 열쇠를 올바른 식생활이 쥐고 있다.
모든 스트레스는 내가 처해진 상황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주어진 상황을 내 힘으로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어쩌지 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스트레스는 가중된다. 따라서 자신이 개입할 수 없다는 자각이 한번 들어버리면 신체는 움직이지 않는다.
당장 에너지를 만들어낼 필요를 느끼지 못하므로 위는 위축되어 위산의 분비가 저하되고 소화가 느려지며 장에서의 배설도 지연되고 신체 내에서 모든 화학반응의 촉발속도가 더디어진다. 그렇게 생각은 민감하게 신체에 반영된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긍정적이고 좀더 적극적이고 발전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어지간해서 소화불량 증상은 생기지 않는다. 생각이 소심하고 적극적이지 못한 것은 사실 영양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갖는 공통적인 문제는 성공한 경험을 통해 자신감을 갖고 그것을 책임짐으로써 가질 수 있는 행복함을 느껴보지 못하는 것이다.
성격적인 문제로 인해 신경이 약화된 경우에도 잘못된 식생활은 고착되어 있고 이는 악순환의 고리에 휘말리게 된다. 잘못된 식생활로 인해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는 경우는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어느 경우에나 식생활과 영양관리를 통해 신경계를 회복하고 튼튼한 고래심줄 같은 신경계를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신경계는 올바른 식생활과 긍정적인 가치관과 생활습관에 의해 회복되고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신경성’이라는 말로 가볍게 여기거나 또는 절망할 이유가 없다. 포기하지 말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사실 약해진 신경만큼 치명적인 것이 없다. 아무리 안 좋은 음식과 화학물질을 먹어 신체가 손상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생각에 의해 분비되는 스트레스  호르몬들은 신체를 바로 산성화시키고 대사를 교란시킨다. 이보다 즉각적인 신체의 반응은 없을 것이다. 신경의 약화, 체액의 산성화, 체질의 변화는 모두 자기 하기에 달렸다.
앞으로 더 이상 질병 앞에 체질을 탓하지 말고 신경성이라고 포기하지 말자. 살 길은 내가 찾는 것이다. 모두 자기 하기에 달린 것이다.

 
질병은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치유되는 것이다
 
치료와 치유는 유사한 개념 같기도 하고 혼용되어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감기에 걸리거나 상처가 나면 진통제나 항생제를 먹어야 낫는다든지, 아니면 합병증의 예방을 위해서라도 약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기는 200여 종이 넘는 바이러스에 의해 발병한다. 감기 바이러스는 현대의학을 비웃기라도 하듯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고, 이 시기의 소아과는 북새통을 방불케 한다. 38℃의 열도 못 견디고 약을 먹여야 마음이 놓이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39℃도 이하의 발열에서는 어떤 해열제도 처방하지 않는 유럽에 비하면 사뭇 다른 풍경이다.
우리나라 엄마들은 감기는 약을 먹어야 빨리 낫는다는 생각과 감기가 약으로 치료되지 않아도 합병증은 예방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진단을 받고 약의 복용을 게을리하여 혹시라도 증상이 심해지면 의사 선생님에게 혼날 일이 아득하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감기는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자가치유력으로 회복될 수 있다. 이를 의심하고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측면만 생각하여 무조건 약물을 처방하는 것은 동전의 한 면만 보고 살겠다는 것과 같다.
엄마가 아이의 섭생을 주의깊게 살피지 않고 입맛 떨어진 아이에게 피자와 치킨, 햄버거와 프렌치 프라이, 콜라를 사주면서 감기가 낫기를 바란다. 이렇게 엄마들의 태도는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이중적이다. 아이들의 몸은 잘못된 먹거리로, 약물로 더욱 괴롭힘을 당해 싸워보지도 못하고 KO패를 당하듯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다.
현대의학은 아직까지도 감기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약물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먹고 있는 약은 무엇인가? 감기증상이 있을 때 먹는 항생제, 진통제, 스테로이드제, 항히스타민제, 진해제 등은 말 그대로 증상에 대한 고통을 일시적으로 제한하기 위한 대증약, 대증요법제들이다.
감기는 당신의 기운이 모두 쇠진했으니 휴식을 취하라는 신호이며, 휴식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낫는 질병이다. 감기는 약으로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섭생과 휴식으로 자신의 자연치유력에 의해 극복되는 것이다
약물의 상습적인 복용은 고통에 대한 역치를 차츰 낮추어간다. 우리는 작은 고통도 참지 못하는 공주가 되어가고 왕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어린 시절 연탄불을 피우던 안방의 아랫목에는 열기가 한 곳으로만 모여 그 자리만 누렇게 변색되었다. 누구나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아우성쳤던 시절이다.
그 당시의 안방에는 아랫목과 윗목이 있었다. 아랫목은 따뜻했지만 윗목은 아주 서늘했다. 그리고 겨울이면 어디서 스며드는지 외풍으로 온통 방안이 서늘하고 이불 속에 코만 내밀고 있어야 했다. 나 또한 그 외풍센 옛날의 가옥구조를 싫어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우리가 집이라는 공간 속에서 찬바닥과 찬기운에 훈련될 시간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단련된 아이들이 찬바람 맞으며 집 밖에서 뛰어놀다 들어온다고 해서 병이 나진 않았다. 요즘의 아이들은 찬바람만 쏘이면 콜록콜록 그 값을 치른다. 그래서 겨울이면 엄마들은 외출이 두렵다. 병날 아이가 걱정이고, 열흘이고 보름이고 기약 없이 병원을 다녀야 할 일이 아득하다.
완벽한 방풍으로 바람 한점 들어올 곳 없는 지금의 가옥구조와, 수년에 걸쳐 뿜어져나오는 석고보드와 플라스틱, 페인트의 화학물질로 인해 우리 아이들의 면역기능은 또 한 번 혹사당하며 작은 고통도 견디기 어려운 공주가 되고 왕자가 되어간다.
옛날 사람들은 감기에 걸리면 장작 지핀 아랫목에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냈다. 바이러스는 열에 약하기 때문에 감기에 걸렸을 때 열이 나거나 체온을 올리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회복을 돕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예부터 감기에 걸리면 몸을 따뜻하게 하여 열을 낸다든지, 황토방과 장작의 원적외선으로 인체 깊숙한 곳에 에너지의 흐름을 증가시키는 것 등은 약이 보편화되지 않고 의료가 제도화되지 않은 시기의 아주 현명한 자가치유법이었다.
이반 일리히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현대사회는 사회 의료화의 발달로 스스로 낫는 것을 잊고 사는 사회라고 지적하고 있다.
병의 원인으로서 환경을 지목할 만큼 그 인식은 포괄적이다. 즉 질병은 음식·공기·물과 사회정치적 평등, 민중을 안정시키는 문화적 메커니즘과 상관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성인이 되어 이것을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가 질병과 사망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했다.
그는 성홍렬·디프테리아·백일해 등을 예로 들면서, 이들 질환의 원인과 치료법이 발견되기 전에 90% 정도 감소하고 있었으며, 암과 같은 만성질환의 경우 암환자의 생존율은 최근 25년 동안 불변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질병이 감퇴되는 원인은 주택의 개선과 미생물 유기체의 독성 감소, 특히 중요한 것은 영양이 개선되어 숙주의 저항력이 상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항생제의 개발과 외과수술의 발달은 생존하는 환자수를 늘리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화학요법은 질병으로 인한 사망 또는 질병을 감소시키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의료의 사회화, 제도화, 전문화, 독점화 속에 병원을 통해 질병이 양산되며, 자율적 의지에서가 아니라 타율적 관리에 의해 질병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현대의학은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약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약은 자기의 모습을 계속해서 바꾸는 바이러스의 특성상 쉽게 개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공기 중에 떠도는 셀 수 없는 수의 바이러스와 세균들과 함께 살아간다. 이를 모두 피해 다니며 살 수는 없다. 감기를 비롯한 어떤 감염성 질병이 낫는 과정은 결국 인간의 면역기능, 자연 치유력에 의한 것이다.
즉 어떤 전능한 치료자에 의해 치료되는 과정 속에 병이 낫게 되는 치료의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침입한 세균과 싸울 수 있는 능력, 손상된 신체를 복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스스로 회복하고 아무는 치유의 과정인 것이다.
잘못된 식생활과 환경오염으로 발생하는 대부분의 만성질환의 경우도 급성·감염성 질환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급성질환이 약으로 치료되지 않듯이, 더더욱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어 신체 내의 교란으로 야기된 만성질환의 경우 또한 내가 먹는 식사가 바뀌고 생활이 바뀌어야 낫는 질환이다.
어떤 질병도, 급성으로 나타났든 만성적으로 진행하든 간에, 약물과 수술의 도움을 받든, 받지 않든 간에 결국 내 몸의 자연치유 능력에 의해 극복되는 것이다.
우리 인체는 음식을 통해 공급된 영양성분으로 호르몬, 항체, 신경전달물질, 면역물질 등 체내 합성약을 만드는 방법을 유전자 속에 기억하고 있으며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다. 감기에 걸렸을 때 몸이 아프고 열이 나는 것은 체내에서 바이러스와 싸우는 합성약인 인터페론을 만드는 과정에서 열이 나고, 그로 인해 몸에 통증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우리 인체의 통증은 내부에 침입한 균과 싸워야 하니까 휴식을 취하고 좋은 영양을 취하라는 경고성의 메시지와 같다. 감기에 걸렸다고 무조건 병원을 찾고 해열제와 진통제, 항생제의 처방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고열과 통증은 처음부터 무조건 없애야 하는 그런 부정적인 증상만은 아니다.
감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질병은 의사의 진료와 약사의 약물투여로 인해 치료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의 질병은 음식의 변화, 환경의 오염, 심리적 불안정에 의한 면역력, 자가치유력의 저하에서 오는 것이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자율적 치유방법들을 터득해나가야 한다.
건강한 음식과 올바른 생활습관, 휴식과 심리적 안정으로 체내의 면역물질, 체내의 합성약들을 만들어 자연치유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며, 이 과정에서 보건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길을 안내하는 조력자일 뿐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이 증가하고 잘못된 식생활과 환경의 오염으로 인한 만성질환이 증가하는 현대에 자연치유의 능력을 높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다시 강조하여 자연적인 치유능력을 증가시키는 방법은 좋은 섭생을 통해 인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물질을 공급받는 것이고, 심리적 안정과 휴식으로 영양의 불필요한 소모를 줄이는 것이며, 바른 자세와 생활습관으로 신체의 모든 상호 연관적인 시스템들을 정상화시키는 데에 있다.
치료(care)와 치유(healing)라는 개념의 차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질병은 종국적으로 자신의 자연치유 능력에 의해 치료되는 것이므로 환자의 면역력과 자연치유력을 중심으로 이해할 경우 이를 질병의 치유라고 말하며, 대증요법을 비롯한 다양한 대체요법을 통해 요법(therpy)을 시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질병의 치료가 된다.
치료는 치유와 상응하는 개념도 아니고 우위의 개념도 아니다. 환자를 중심으로, 인간의 자연적인 치유능력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치유의 개념은 더 본질적이다. 하지만 치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실수하고 있는 것은 모든 요법에 대한 맹신과, 환자는 치료자에 의해 치료되고 있다는 공급자 중심의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것이다.
모든 공급은 수요를 쫓아가게 되어 있고, 수요는 공급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한다. 모든 치료자는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 의해 자생적으로 발생했던 직업적 분류이며, 개인의 환경과 정치·경제·회·문화·자연환경의 영향 속에 질병이 발생한 환자들을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가운데 치료의 방법과 치료자의 의미가 달라지게 된다.
독점된 지식을 기반으로 환자 위에 군림하거나, 개개인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의 부재와 자신의 치료방법의 맹신으로 환자를 질병 치료과정에서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 결국 질병이 나아가는 과정은 훌륭한 조력자를 만나 그를 신뢰하고 그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치유능력을 극대화시켜 낫게 되는 것이다.
자연치유 능력을 증가시키는 방법들은 사회 전반에서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이는 환경의 변화와 함께 현대인의 질병의 변화 속에 나타나는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뢰하는 한의학적 방법이 우리나라에서는 대체요법으로서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이는 제도 안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의 문제이다.
사회 곳곳에 침과 뜸, 지압과 안마, 척추교정과 마사지, 요가와 기공, 향기치료와 음악치료, 심리치료와 정신요법 등 인간의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되고 있고, 그 흐름도 깊다.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는 약과 수술이라는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할 수 있고, 깊은 종교적 신앙심으로 쾌유의 속도를 앞당기기도 하며, 뇌와 척수로 흐르는 신경을 둘러싸고 있는 척추의 바른 교정을 통해 신체의 건강을 도모하기도 한다.
예술적 행위와 상담자의 능력에 따라 심리적 이완과 안정을 되찾고, 물리적인 자극과 자신의 수련방법을 통해 신체의 유연성과 정신적 통일을 회복하고, 현대의 잘못된 식생활의 반성과 영양의 관리를 통해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도울 수 있는 방법들이 입증되고 활용되고 있다.
질병은 다양한 방법으로 회복과 치유의 과정을 밟는다. 이렇게 질병의 치료는 우리나라와 같이 그 신분이 법적으로 보장되는 의사와 한의사에게만 주어져 있는 일은 아니다. 병은 의사도 고치지만 우리가 먹는 밥이 고치기도 하고, 종교적 신앙심이 고치기도 하며, 믿음이 크면 무당의 굿이 고치기도 한다.
질병의 치료는 현대의학을 공부한 의사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정통적인 의사는 현대의학적 도구와 약의 발달에 따라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훈련된 사람들이며, 죽음의 문턱에서 또는 질병의 급성적 진행상태를 해결하는 의학의 한 파트를 책임지는 전문그룹이다. 훌륭한 의사라면 다양한 처지의 환자를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치료방법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그 방법을 안내해야 한다.
의약분업과 함께 맞물려 문제되고 있는 약사의 의료행위 여부는 아주 예민한 부분이다. 약사가 약을 팔기 위해 어떤 문진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문진은 진단을 위해 말로 묻는 것이다. 약사가 진단할 수 있는 장비와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옷가게에서 옷을 사는데 사이즈를 묻고, 색깔과 디자인이 어울리는지를 봐주는 것도 어울리는 옷을 팔고 입기 위해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이다. 이런 식의 대화가 질병의 치료를 돕고자 하는 사람과 치료를 원하는 사람 사이에 이루어질 경우 상담이라고 한다. 상담은 교회의 목사님도 하며, 시민단체의 상담소에서도 한다.
우리는 또 친구와 스승에게 인생을 상담하기도 한다. 약사가 하는 상담의 내용이 진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충분한 상담은 보장되어야 한다. 어떻게 진통제 한 알을 팔아도 말 안 하고 약을 팔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약사들은 다양한 환자들을 시간적인 제약 없이 여유있게 만나고, 환자를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의사보다 많아 그 역할이 유리하다.
모든 제도는 환자를 위해 재정비되어야 한다. 여유있는 상담을 통해 이해한 환자의 이력이 의사에게 고지될 수 없는 시스템이 문제인 것이지, 현 제도 속에서 약사의 상담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상담행위 자체를 막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환자와의 상담을 통해 깊은 이해와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힘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고, 잘못된 식생활이 문제가 되는 사람은 영양상담을 통해 식생활을 개선하고 영양의 관리를 통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 근육을 쓰지 않아 문제가 되는 사람은 운동치료로, 자세가 잘못되어 척추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자세를 바꾸고 척추를 교정하여 질병을 치료할 수 있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문제라면 인생상담과 정신을 편안하게 하는 도구와 개인적 수련방법을 통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혼돈된 문제들과 환자들의 방황은 질병의 시대적 변화에 대한 정부의 인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현 상황을 직시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제도적 정비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는 이러한 흐름의 묶음을 자연치료의학이라는 학문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자연치료의사를 양성하는 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또한 미국에서는 클린턴 정부시절 백악관 내에 정부산하 ‘대체의학위원회’를 발족하여 정부 차원의 연구와 지원에 나섰다. 미국에는 현재 정통의학을 가르치는 의과대학뿐만 아니라 백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카이로플래틱 의학을 가르치는 대학과 자연치유대학이 있어 자연치료의사, 카이로플래틱 의사들이 전문적으로 양성되고 있다.
그들은 일선에서 약과 수술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적인 치유방법에 의한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일차 진료의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질병이 변하고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 기로에 놓여 있다. 언제까지 귀를 막고 입을 막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학문적 성과는 인간을 중심으로 유연하게 적용되고, 치료자는 환자 앞에 군림했던 모든 권위를 벗어던지며 자신의 위치를 반성하고, 환자는 치료자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자연치유 능력을 믿고 발휘하며, 정부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현실적으로 제도화하는 노력을 더이상 미루어서는 안 된다.
 
주부들이여, 식탁의 설계사가 되자
 
먹거리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고, 생각과 행동의 범주들이 달라지기까지는 많은 단계를 거치게 되고 시간도 소요된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올바른 식생활에 대한 인식과 절박함이 부족하고, 여러 조건의 제약으로 실천하고 있지 못하는 형편이다.
어찌 보면 이를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은 기존의 자신의 생각들과 살아온 생활양식들이 붕괴되는 처참한 자기 반성의 시간이기도 하다. 영양과 먹거리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은 자신과 가족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과거를 들추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리를 잘하는 것이 자랑인 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중학교 시절 가정시간에 붙여진 별명이 ‘김채’였다. 경험이 없을 것 같은 나이에 나는 칼질을 잘했고, 근사하고 폼나게 채를 쳐냈기 때문이다. 그 생각과 자신감은 결혼을 하고도 지속되었다. 음식은 맛있게 하면 되고 보기 좋게, 좀더 색다르게 무언가를 지속해서 연구하고 만들어낼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식생활과 영양의 중요성을 깨닫고 난 후에는 더 이상 날렵한 칼솜씨도 필요없고, 더군다나 근사한 요리법을 찾아헤맬 이유 또한 없어졌다. 이제 큰 냉장고와 요리 잘하는 엄마가 건강을 망친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가 되었으니, 요리 하면 엄두도 못 내는 엄마들이 자신감을 가져도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연예인들이 발간한 그 많고 화려한 요리책의 매뉴얼을 따라하지 못해 남편에게 구박받고 상처받은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세울 때가 된 것이다.
집을 꾸미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여성잡지에 소개되는 연예인의 집을 구경할라치면 그 감각과 센스에 부러움으로 침을 삼켜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먹거리의 중요성, 먹거리를 잘못되게 만드는 환경오염의 문제를 깨달으면서 집수리 잘하는 주부의 부지런함은 더 이상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1년에 한 번 도배를 새롭게 하거나 페인트칠을 하면서 집을 단정하게 꾸밀 수 있는 주부는 더 이상 칭찬의 대상이 아니다.
결국 그런 보기 좋음과 청결함이 식구들을 환경오염 물질로부터 지속적으로 혹사시키는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깨끗한 주부는 그 반짝반짝 빛나는 유난스러움에 만족할지 모르지만,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 모두가 락스와 세제와 화학제품의 사용을 늘리고 그것으로 괴롭힘을 당해야 한다.
이제 이 모든 것에 의해 기죽었던 주부들이 어깨를 펼 세상이다. 표백제 덜 쓰고 좀 누렇게 입으면 어떻고, 살균제 안 쓰고 한 번 더 삼거나 햇빛에 건조하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음식을 준비하는 일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다든지, 내가 사는 집을 예쁘고 아늑하게 꾸미기 위해 노력하는 열정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건 취미와 자랑거리로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기본으로 아름다운 작업들이다. 다만 우리에겐 어떻게 가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부재했던 것이다.
현대는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널리 정보가 공유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잘못된 정보는 기업의 상업적 목적을 위한 고도의 사이버 전략과 마케팅 정책 속에 확대 재생산되고, 진실은 잘못된 정보의 홍수 속에 잠겨버리기도 한다. 우리에겐 좋은 먹거리를 선택하고 좋은 요리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시멘트벽과 페인트와 도배지와 도배풀이 뿜어내는 화학물질의 피해를 알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독일은 사회적으로 주부의 역할을 크게 강조하기로 유명한 나라인데, 아직도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 세상 밥은 누가 짓나? 빨래는 누가 하나? 아이는 누가 낳고 키우나? 남자가 아니야. 그건 여자야. 우리 엄마야.”라는 동요를 부른다고 한다. 그만큼 가사노동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주부로서가 아니라 한 가정을 꾸리는 삶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크게 평가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의 부모들이 희생을 감수하고 살아온 모습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희생은 지금 고부갈등의 최대의 불씨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가? 희생이 아니다. 보상을 염두에 둔 희생이 절대 아니다. 다만 내가 선택한 삶의 만족과 책임만 있을 뿐이다.
이 땅의 여인네들은 가정과 인생의 주체로서 소외된 과정을 설명할 수 없었고, 희생과 양보라는 미덕으로 자신을 포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희생과 양보는 누구를 위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결국은 살아남기 위한, 자신을 위한 변명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이런 명분으로 여성의 삶이 지켜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환자를 상담하면서 이런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구조와 삶에서 소외되는 과정을 통해 여성들이 병들고 있음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토록 위대한 일을 하면서도 소외되고 병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같은 여성으로서 가지게 된 안타까움과 연민과도 같은 것이다.
스트레스는 나의 생각과 의지로 상황을 바꾸어나갈 수 없을 때 가장 크게 문제가 된다. 스트레스를 받아 병이 되었다지만 스트레스를 자신의 의지로 해결해 볼 엄두도, 노력도 못 하게 하는 자신의 생각이 가장 문제인 것이다.
어떤 일이든 자신의 책임으로 느끼며 일의 바람직한 해결을 위해 무언가를 모의하는 사람에게 스트레스는 더 이상 스트레스로서 작용하지 않으며, 만족할 만한 결과가 확실한 단지 위기일 뿐이다. 어떤 일을 해도 자신의 경험과 판단이 들어간 경우에만 주인된 책임이 있고 주체로서의 만족이 있다.
주부의 삶은 결혼 전부터 조작되고 강요되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이루어내는 결혼생활을 통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여성들은 침묵과 희생과 양보로 단련되어야만 살 수 있다고 세뇌당해왔다. 실제로 삶의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도 자신의 생각과 경험의 총체로써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침묵과 양보와 희생의 이념만이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
그런 과정 중에 여성의 삶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주체적인 만족보다는 희생적 소외로써 재생산되어왔다. 아이를 위해 밥을 해도 즐겁지 않고, 남편을 위해 와이셔츠를 다려도 즐겁지 않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많은 젊은 주부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식사를 챙기는 일 자체를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식한다. 밥은 한술 때우고 와이셔츠는 세탁소에 맡기고 책을 보거나 취미생활이라도 하고, 내 건강을 위해 헬스센터라도 다녀야 위안이 되는 그런 세월을 보내고 있다. 남편과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에 무언가로 자꾸 보상받고 싶다.
잘난 아들을 키우기 위해 감수했던 시어머니의 희생이 며느리와의 대화를 순조롭지 못하게 하듯이, 그 주부의 희생의 가치 또한 남편이 몰라주고 자식도 몰라준다. 왜? 그건 엄마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밥상이었고 아내의 마음이 떠나간 와이셔츠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내가 받아들인 침묵과 희생의 이념 앞에 또 다른 소외를 낳고, 이는 더 큰 상처로 남게 된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단위로서 뿐만 아니라 주부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때문에 그곳에서 삶의 주체로서 훈련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도 마음 한곳 허전함과 소외감에 허탈할 수밖에 없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하는 일에 의미를 발견하고 행복감도 얻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주부는 가정의 관리사다!
부모가 해준 밥 먹고, 빨아준 옷 입고, 놀러가고 싶으면 놀러갔고, 먹고 싶지 않으면 안 먹었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았던…… 그렇게 자기 중심적인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가 갑자기 남편 중심, 시집 중심, 아이 중심으로 살다보면 어디에도 내가 없는 듯 공허해질 수 있다.
그래서 주부들은 빨리 아이를 키우고 나서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벼르기도 하고,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헬스클럽에 등록하고 취미생활을 하고 컴퓨터와 영어회화반에라도 등록해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더하고 살아 있는 느낌을 받으려 애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새 시들해지는데, 이것 또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소중한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공허함 때문이다. 사람은 하루 일과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종사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않으면 인생 자체가 피곤해진다.
내가 매일 하는 일, 빨래하는 일, 식사를 준비하는 일, 집을 꾸미고 가꾸는 일, 아이에 대한 올바른 육아정보와 영양정보를 받아들이는 일…… 이 모든 일들이 소중하다. 아니,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신성하기까지 한 작업들이다.
이 모든 일을 해내는 주부는 대단한 존재이다. 섬세하고도 다양한 일들을 온유하고도 강력하게 수행하는 여성들에게 21세기의 최고의 키워드가 쥐어져 있다는 견해는 새삼스럽지 않고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내가 다려준 와이셔츠를 입은 남편은 기운이 절로 날 것이고, 엄마가 엄선한 재료로 정성껏 만들어준 음식을 먹으며 아이들은 사랑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러한 주부로서의 일들이 적성이 아니라면 여성들은 과감히 자기 삶의 또 다른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대리 양육자를 모색해 아이들을 교육시켜 올바른 지침을 수행하게 하고 자기 삶의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하는 기본적인 일들에 대해 충분히 배려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훈련부터 해야 한다. 주부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설계하고 만들어가는 가정의 관리사이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 것만큼 이루고 산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꿈이 중요하고, 주부의 생각과 희망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자신과 아이와 남편의 흥망성쇠가 달려 있다. 주부는 누가 뭐래도 가정의 관리사이다.
무엇보다 식탁의 설계사라는 말을 쓰고 싶었지만 이것이 가진 의미는 가정관리사의 역할 중에 모두 녹아 있는 듯하여 별도의 설명이 불필요해졌다.
생활설계사들이 보험에 가입시키기 위해 연령과 성별, 직업과 수입, 건강상태를 체크하여 고객에게 맞는 보험상품을 권하듯, 매일 식탁을 설계하는 주부들은 매일 식탁에서 마주 대하는 사람들이 어떤 상태이며, 어떤 영양과 식사가 필요한지 잘 알아야 한다. 매일 식탁에 오르는 밥은 어떠해야 하는지, 반찬은 어떠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준비하기 위해 사전작업들은 어떤 것이 필요한지까지 잘 알아야 한다. 이것이 설계사가 할 일이다. 이렇게 주부는 식탁의 설계사이며 가정의 관리사이다.
난 약사로서 주부들이 가정의 관리사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통해 진심으로 기뻐하고 병들지 않기를 바란다. 또 난 아이의 엄마로서 우리의 아이들의 건강한 먹거리로 몸도, 마음도, 머리도 건강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또 난 가정의 주부로서 가족 누구나 건강하여 웃음을 잃지 않고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다시 시작하는 이 모든 마당에 주부들이 함께 하기를
출처 : 들꽃은 스스로 자란다
글쓴이 : 하으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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